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ed Jul 25. 2021

16메가 mp3와 고 녀석

귀여워 혼도 잘 안 냈던 딸 녀석이 결국 사고를 쳤다. 말 그대로 사고.

학원에서 뛰어다니다 학원 선생님의 컴퓨터를 깨뜨린 거다. 뭐 그럴 수 있다. 내가 쳤던 사고를 생각해보면, 아니 첫째 녀석과 둘째 녀석이 번갈아 가며 만들어냈던 병원 청구서, 손해배상 요구 등도 같이 생각해보면, 그럴 수도 있지. 살면서 그런 사고 없이 어떻게 사나. 하지만 작은 실수에 비해 배상은 항상 크다. 아깝기도 하고 또 다른 방법은 없을까 하고 지인 찬스를 시도해본다.


장엽이를 우연히 만난 건, 유학 박람회에서 정말 운 좋게 당첨되어서 경품으로 받았던 16메가(분명히 쓰지만 16메가였다. 기가 아니고) MP3 플레이어에 문제가 생겨서였다. 운 좋게 경품으로 받았던 당시 최신 문물 mp3 플레이어는 삼성의 제품이었고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지만 무슨 문제가 있었던 거다. 그러니까 햇수로 생각해보자면 그때는 아마 1999년쯤, 아니면 2000년 어딘가 였을 것이다. 살길 찾기에 바빴을 바로 그때쯤이었다.


서비스센터는 구월동이었던 것 같다. 부평 토박이인 내가 왜 거기까지 가서 서비스를 받으려고 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구월동에 가서 문제가 있는 mp3 플레이어를 들고서 내 차례를 기다렸다. 거기서 장엽이를 만났다. 지금도 그렇지만 장엽이는 브루스 윌리스를 닮았다. 아니, 닮았다고 내가 생각하는 거다. 약간 쳐진 눈매며 씽긋 웃는 입가가 윌리스 형을 닮았다. 그때도 그랬다. 날 보고는 그냥 씽긋 웃었다. 그리고 16메가가 부족하지 않냐고 물어봤던 것 같다. 난데없는 질문에 나는 부족한 것 같기도 하다고 했던 것 같고.


지금에야 고백이지만, 난 그때 장엽이를 몰라봤던 것 같다. 근데 고 녀석은 날 바로 알아봤던 거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멍청한 나는 5학년 3반 최장엽을 알아본 거다. 그때 그렇게 친하게 잘 지냈던 그 친구를.


고 녀석은 아무런 대가도 없이 16메가(기가 아니다)를 32메가로 업그레이드 해줬다. 한 때 발명반의 일원으로 전국의 발명대회를 휩쓸었던 나로서는 고 녀석이 메모리에 붙어 있는 발 하나하나에 납땜을 하면서 그 귀찮은 일을 해주고 있다는 일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었다.

분명히 그 일은 귀찮은 일이었다. 안 해도 되는 일이었다. 모른척하면 편할 일이었다.


다시 나는 고 녀석을 귀찮게 한다.

“이런 일이 있어서 내가 물어줘야 될 거 같은데 얼마나 나올 거 같냐?”

“어, 직원들 시켜서 견적 알아볼게”

“그런데 너 지금 어디에 있어?”

“응, 당하동”

“당하동? 우리 동네 당하동?”



고 녀석이 우리 동네 근처에서 일한단다.

돈은 어쩔 수 없이 들긴 들겠다. 하지만 가까운데 고 녀석이 있다.


사람 일이 모를 일이라지만 갑자기 그날의 고마움이 떠오른다. 그저 친구라서 베풀어줬던 친절과 배려. 벌써 삼십 년 가까이 지난 일이고 이젠 메가라는 단위도 더 이상 쓰지 않는 시절이 되었지만 그날의 무심한 척, 무덤덤했던 고 녀석 장엽이의 마음 씀이 다시 생각난다.


갑자기, 그랬던 다른 녀석들도 생각난다. 내가 지금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어서가 절대 아니다. 전쟁 같은 코로나 상황에, 보고는 싶지만 참아야 하는 이런 시절에도 나는 너희들이 생각난다. 나는 너희들이 보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손가락 번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