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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북 Dec 28. 2017

성북동 사람들의 영원한 모교
성북초등학교

[5호] 글 이태훈

  매일 아침 운동장을 들어서면 변함없는 모습으로 날 맞이하는 학교 교정을 보면서 가물가물한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들이 한 조각 한 조각 떠오른다. 난생처음 짝이 된 여자아이와의 재미난 대화로 행복에 젖어있던 무렵 너무 떠든다는 이유로 짝이 강제 교체가 되어 세상이 무너지는 듯 대성통곡했던 일학년 어느 날이 기억난다. 또 키 큰 거인 아이가 같은 반이 됐다는 소문에 호기심으로 두근거렸던 이학년, 짝사랑했던 짝꿍을 이유 없이 괴롭혔던 삼학년, 예쁜 아이에게 관심이 커져가며 다양한 경쟁의식 속 소심한 아이였던 사·오학년 시절도 떠오른다. 나는 이렇게 초등학교라는 작은 사회 안에서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렇게 고학년이 되면서 공부 잘하는 애, 잘사는 애, 잘 생기고 예쁜 애, 싸움 잘하는 애…. 서로를 그렇게 구분 짓고 그 안에서 무언가로 소문나고 자리 잡힌 자기 역할을 하며 사회성을 키우며 나는 조금씩 성장했다.

  나는 전교생 소풍에서 오락시간 사회를 볼 정도로 전국구 까불이였지만 또 한 편으로는 한없이 내성적이고 소심했던 어린아이였다. 그런 나의 눈으로 볼 때 어떤 선생님은 너무 가혹했다. 반면에 어린아이 같은 눈물을 흘려주시던 선생님도 계셨다. 그런 어린 시절 많은 기억들이 교정과 함께 떠오른다. 


  서울에서 성북 초등학교만큼 백 퍼센트 그 동네아이들로 구성된 토박이들만의 초등학교가 있었을까? 같은 동네에서 산다는 이유만으로 한 초등학교에서 만나 육년 동안 인연을 나눴던 우리 동창들은 졸업과 함께 흩어져 서로 다른 환경 속에서 각자의 인생길을 쉼 없이 달려왔다. 그리고 나는 어느덧 흘러버린 삼십오년의 세월과 함께 이제 한 대학생의 학부모가 되어 버렸다. 그 긴 세월 속 많은 만남과 인연이 있었을 텐데 여전히 그 어릴 적 초등학교 시절을 그리워하며 다시 성북초등학교로 모인 우리 동창들의 모습은 마치 산란을 위해 고향산천의 냇가로 모여든 연어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났듯 못났든 성공했든 성공하지 못했든 개의치 않고 만나 어린 시절 순수했던 우정을 되살리고, 서로에게 삶의 안식처가 되고 있다. 이런 우리 동창들의 공통된 기억의 중심에는 두말 할 것 없이 성북 초등학교가 있다.


  수줍음도 많고 어리석었던 초등학생 우리들의 옛 모습을 다시 돌아보며 “누가 누구를 좋아했었느니”, “누구는 그때 참 어땠느니” 그땐 정말 몰랐던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성북초등학교는 정말 드라마틱한 연극이 펼쳐졌던 유년기 시절의 소중한 무대였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중고교를 남자학교로 갈 수 밖에 없었던 그 시절이었기에 더 소중했던 여학생들과의 마지막 기억들도 늘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야릇한 설렘으로 꺼내보는 일기장 같은 추억이 된 그 기억의 장소 역시 성북 초등학교다.


  압도적인 인기로 전교 퀸이었던 그 여자아이의 집 앞으로 이사를 가게 된 사실만으로도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었다. 영화 ‘천녀유혼’ 속 지옥마왕의 결혼행렬에 나오는 아리따운 신부 왕조현의 모습처럼 슬로우 모션으로 그 아이가 복도에서 내 앞을 지나갔다. 그 장면은 강렬한 환상으로 육학년의 기억이 되고 말았다. 졸업식 날 전교 부회장으로 온갖 상을 다 휩쓸었던 그 아이, 호명될 때마다 다소곳이 치마를 정리하며 서고 앉고를 반복하는 그 아이의 뒷모습이 기억되는 아련한 내 지난 짝사랑의 연극무대가 바로 성북 초등학교 교정이었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지만, 그 친구가 빤짝이 의상을 입고 동창회에 나타나면 과거의 스타에 대한 예우로 전 남자 동창들의 우레와 같은 기립박수를 치곤 한다. 그 기억 속의 아이를 만날 수 있는 행운 또한 성북 초등학교가 있기에 가능한 것 같다.

  이제는 스스럼없이 예전 얘기를 하면서 내가 너무 인상을 무섭게 써서 말도 못 붙였다고 웃는 그 친구를 보며 “하긴 내 인상이 강하긴 하지” 생각하면서도 마치 피천득 선생의 소설 ‘인연’처럼 “만약에…” 하는 흐뭇한 생각도 하곤 한다.


  성북동에서 태어나고, 어느덧 오십 가까운 세월을 성북동에서 살아온 토박이에겐 세상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마음의 평안을 주는 곳이 나의 모교 성북초등학교다. 돌아보면 이제는 참 많이 변하긴 했다. 하지만 산동네 드센 아이들의 주먹질에 또 부잣집 아이들의 돈 자랑에 치이기도 했고, 일찍 찾아온 사춘기 내 마음을 몰라주던 여자아이의 매몰참에 좌절하기도 하고, 군국주의식 교육의 잔재가 남았던 교사들의 혹독한 교육이 마음에 들지 않기도 했지마, 그런 우여곡절 속에 여전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성북 초등학교를 떠올리며 나는 하루도 안 거르고 매일 아침 이 교정에서 동네 축구 동호인들과 왁자지껄 공놀이 한판으로 나의 일과를 시작한다.


  가을이면 운동장 위에 푸르게 펼쳐진 넓은 하늘을 까맣게 메우던 잠자리 떼들에 가슴 설레어 누구노래인지도 몰랐던 유행가 ‘고추잠자리’를 멋모르고 따라 부르던 기억, 낯선 곳에서의 보이 스카우트 유년캠프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의 푸근함으로 날 맞아주던 고향 같은 따뜻함을 내게 늘 선사하던 그런 곳이 성북초등학교였다.

  이동이 잦은 현대인의 거주 패턴을 고려했을 때 시골도 아닌 서울에서 이처럼 고향의 정체성을 자연스럽게 갖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할 일인지…. 직장과의 거리, 자녀의 교육, 부동산의 투자가치 등 많은 걸림돌이 있어도 결코 나를 떠날 수 없게 하는 마음 속 큰 고목나무인 성북초등학교는 늘 새롭고 행복함을 느끼게 하는 내 사랑하는 고향산천의 모교 인 것이다.

  나의 모든 유년시절의 기억들이 살아 숨 쉬고 있는 이곳 성북초등학교는 어쩌면 매일 아침 우리들의 아름다운 추억을 지키는 마을입구 장승 같은 것이 아닐까?

  축구를 마치고 빠져나가며 바라보는 모교의 교정은 맑다. 내 모교는 오늘도 꼬맹이들과 함께 무척 바쁜 하루를 보낼 것이다. 우리에게 소중한 수많은 기억의 무대역할을 했었듯이 우리들의 이세들에게도 새로운 추억을 여전히 안겨주고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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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훈은 성북초등학교 34회(1976년 입학) 졸업생이다. 약수동에서 태어났지만, 난 지 6개월 때부터 줄곧 성북동에서 성장했다. 지금은 성북동 이웃 삼선동에서 살지만 성북동을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경희대학교 디지털콘텐츠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5호는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2015 마을미디어 활성화사업에 선정되어 사업비를 지원받아 간행되었습니다. 소개된 글은 2015년도에 쓰여져 잡지에 실렸으며, 2017 동 사업을 통해 웹진으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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