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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북 Jun 19. 2020

성북동 골목길을 거닐다

[13호]성북동 마을여행 - 골목탐방 | 글 최돌이 · 사진 김선문

글 최돌이

사진 17717 김선문



“그런데 과자 부스러기가 섞여 있는 한모금의 차가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몸 안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깨닫고 소스라쳤다…. 그 순간 갑자기 추억이 떠올랐다. 이 맛, 그것은 콩브레 시절의 주일 아침(그날은 언제나 미사 시간 전에 외출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내가 레오니 고모방으로 아침 인사를 하러 가면 고모가 곧잘 홍차나 보리수꽃을 달인 물에 담근 뒤 내게 주던 그 조그만 마들렌의 맛이었다. 여태까지 나는 늘 프티트 마들렌을 보아왔지만 실제로 맛보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떠올리지 못했다. 그 이유는 아마, 그 뒤 과자가게 선반에서 몇번이고 마들렌을 봤지만 먹지는 않고 지내왔으므로, 드디어 그 심상이 콩브레에서 보냈던 나날과 떨어져 보다 가까운 다른 나날과 이어져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에서



밤이 깊어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사람들이 집으로, 집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깊어지는 밤과 함께 서 있는 곳은, 성북동의 한 국수집 즈음에 있는 ‘성북동과 문학’ 표지 앞. 언제부터 이곳에 표지가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어느 순간 눈에 들어온 것. 다만, 나는 일상의 ‘삶’이 애타도록 그리운 밤이면 이곳으로 와 표지 속에 살고 있는 ‘성북문학냥이’의 눈으로 도로 건너편, 잃어버린 시간을 찾을 수 있는 그 골목길이 시작되는 곳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어슬렁어슬렁 그곳으로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잃어버린 시간과 기억, 삶을 소환해내려고 말입니다. 내일 다시 살아갈 힘을 받아가려고 말입니다.


국수 집에서 조금 올라가 길을 건너면 성북문학냥이가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바로 그 골목길로 갈 수 있습니다. 가파른 계단이 이어지는 곳. ‘부자성북부동산’에서 시작되는 길. 오늘 산책길입니다. 올려다보면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계단이지만 시작과 끝은 있는 법. 어두운 길이라 일상에 지친 영혼에 불안이라도 몰려올라치면, 어느 친절한 집 주인장이 밝혀 놓은 대문의 노오란 등이 불안을 잠재워주는 길입니다.


성북로와 창경궁로35다길(경신중학교 울타리 길)을 잇는 성북로13길 계단

계단을 하나씩 하나씩 다리에 힘을 주고 올라가봅니다. 가다 힘들면 손을 잡을 중간 봉도 있답니다. 양 옆으론 집들이 있고, 담벼락에는 담쟁이인지 아니면 그 무엇인지 이름 모를 풀들이 그림자를 드리우며 반겨줍니다. 바람이라도 불면 풀도 그림자도 같이 흔들립니다. ‘어서 오라고. 이곳에서 네 영혼을 잠식했던 불안을 잠재우고 만만찮은 삶일지라도 살아있다는 것, 하루하루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고 가라’고 이야기합니다.

끝날 것 같지 않던 계단이 사라질 즈음이면 길이 좁아집니다. 서울 아니랄까봐 좁아진 그 길에는 항상 2대 정도의 자동차가 주차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여기 어디쯤 사는 분들의 차이겠지요. 자주 보니 주차된 차마저도 반갑습니다. 몸을 돌려봅니다. 올라왔던 계단을 내려다보다 눈을 하늘 쪽으로 살며시 올리면 성북동의 야경이 보입니다. 비록 아직까지는 조각난 야경이나 ‘참 다소곳한 야경이네’라고 내뱉어지는 따뜻한 풍경입니다. 성북동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매력입니다. 반짝반짝, 휘황찬란한 야경이 아닌,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따뜻한, 사람 냄새나는 야경입니다. 계단 끝에 앉아 잠시 숨을 돌리고 그 ‘따숨’을 만끽하고 있자면 곁에 있는 환한 창문에서 TV소리, 음악소리, 사람들의 웃음소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리는 운 좋은 날도 있습니다.

‘아, 다들 오늘 하루 잘 보내고 집에서 편히들 쉬고 있구나! 다행이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일진데도 안도의 마음이 드는 건 무슨 이유에서일까요? 이 골목길이 가져다주는 분위기 때문일까요? 세상 모든 것은 연결돼 있어서인지, 이곳엔 사람이 살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소리들은 도시의 소음이 아니라 조곤조곤 귓가에서 울리는 따뜻한 세상의 소리입니다.


계단으로 이어진 골목길이 끝나는 곳엔 경신중고등학교가 있습니다. 캄캄한 밤, 불 켜진 교실 창문을 본 적이 있나요? 이 깊고 푸르른 밤에 우리의 아이들은 왜 저기에 앉아 공부라는 것을 하고 있는지...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텅 빈 운동장일 때도, 몇몇 아이들이 산보를 할 때도 있습니다. 파란색 철창담 사이로 보이는 학교 운동장과 농구대는 행여 외로워 보이기도 하지만 환하게 불을 밝힌 경비실과 가로등이 있어 평화로워 보입니다. 이젠 학교와 집들 사이의 큰 길로 나왔습니다. 언덕 위의 길입니다. 아담한 단독주택과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주택들이 있는 곳. 밤하늘이 가운데로 난 한적한 그 길은 까마득하게 잊고 지내던 푸르렀던 청소년기의 기억을 소환해줍니다. 오른쪽에는 밤 한가운데 놓인 중고등학교가 곁을 지키고 있고 왼쪽에는 불빛 새어나오는 집들이 있습니다. 화단이 있는 집도 있어요. 참 어여쁜 꽃들이 반겨주고 차가운 시멘트 사이로 나보란 듯 올라와 있는 민들레도 보입니다. 밤은, 그리고 길은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건네줍니다. 한낮 태양 아래에서는 조용히 침묵하고 있던 생명들이(아마도 우리가 듣지 못하는 거지 재잘대고 있을 거긴 합니다만) 밤이 되면 소곤소곤 말을 꺼냅니다. ‘당신, 오늘도 수고했어.’라고 말입니다. 지나쳤던 생명체들의 두 팔 벌린 환대가 벅찬, 밤길. 성북동의 깊은 밤길입니다.


창경궁로35다길 - 경신중학교 울타리 옆, 성북과 종로의 경계

밤이 더 깊어갑니다. 이제 슬슬 집으로 돌아갈 때입니다. 한 곳만 더 들렀다 가려합니다. 이화빌라 주차장입니다. 지인이 살았던 곳이었습니다. 오늘 어슬렁거린 골목길도 지인 때문에 알게 된 길이랍니다. 참 고마운 친구입니다. 이화빌라 주차장의 묘미는 조각난 야경이 아닌, 온전한 성북동 야경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혹 빌라사람들에게 방해라도 될까봐 살금살금 주차장 담벼락으로 걸어갑니다. 탁 트인 성북동의 밤 풍경이 달려듭니다. ‘와락’하고 말입니다. 한참을 바라보며 머리를, 마음을 내려놓습니다. 그러면 잃어버렸던 시간들이, 기억들이, 공간들이 슬그머니 다가옵니다. 어릴 때 따뜻했던 기억들, 등하교길 친구들과 함께 다니던 골목길들, 저녁 무렵 대문 앞에서 우리를 부르던 엄마, 아빠의 ‘밥 먹자’ 하는 소리들. 동네 어르신들의 밤마실에 꼽사리 끼어 잠안자고 놀던 기억들. 그런 기억들이 이미 곁에 와있습니다. 입가에 나도 모르는 사이 미소가 올라오고 심장이 따뜻해지는 것이 느껴지시나요? 분주하고 정신없었던 하루를 보낸 우리에게 선물이라도 주듯, 성북동의 밤 골목길이 선사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여행. 이제 진짜 집으로 돌아가야 겠습니다.


골목길 여행이 끝나는 곳은 아름드리나무가 있는 곳. 항상 거기 있는 나무와 파출소가 이 여행이 끝나는 장소입니다. 성북문학냥이도 피곤한지 다시 표지 속으로 들어가겠답니다. 저도 나무 한번 올려다보고 올라가 보려 합니다. 오늘도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 당신, 일상의 삶이 잠시 당신을 흔들어놓을지라도 결코 휘청거리지 말아요. 아마도 성북동 골목길은 당신이 이 곳에 있을때까지 당신 곁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겁니다. 그리고 우리, 이 길이 우리의 영혼을 달래주도록 지켜내봐요. 이 삭막한 서울이라는 도시에게서, 무지막지하게 몰려오는 자본이라는 괴물에게서 말입니다. 오늘 밤 당신이 평화로운 꿈, 아름다운 꿈속에 머물기를 온 마음으로 기원합니다.  [끝]





선물


포루그 파로흐자드


나 저 깊은 밤의 끝에 대해 말하려 하네

나 저 깊은 어둠의 끝에 대해 말하려 하네

깊은 밤에 대해

말하려 하네


사랑하는 이여

내 집에 오려거든

부디 등불 하나 가져다주오

그리고 창문 하나를


행복 가득한 골목의 사람들을

내가 엿볼 수 있게




최돌이(필명)는 성북동 부근 해오름한진한신아파트에 살고 있다. 서울 이곳저곳을 떠돌다 1999년 이곳에 자리잡았다. 성북은 베드타운으로 사용하다 잠시 숨고르고 있는 요즘, 밤마다 밤고양이처럼 동네를 어슬렁어슬렁 거리고 있다. 지나온 시간도, 사람도, 골목길도 애정을 가지고 들여다 보면 ‘예쁘고 사랑스럽다. 귀하고 소중하다’는 말을 온몸으로 체감하며 성북동 골목길을 탐험 중이다. 오감을 뛰어넘어 육감을 흔들어 놓는 성북동의 골목길들을 산책하는 골목산책가이다.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13호는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2019 마을미디어 활성화사업》에 선정되어 사업비를 지원받아 간행되었습니다. 소개된 글은 2019년도에 쓰여져 잡지에 실렸으며, 동 사업을 통해 웹진으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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