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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북 Jun 27. 2017

내가 살던 성북동의 기억, 성북동 풍경

[2호] 성북동 이야기│글 권순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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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7년 중학교 입학시험이 한창이던 시절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나는 무작정(?) 상경하여 성북동에 둥지를 틀었다. 강원도 오지의 광산촌 철암(지금은 태백시 철암동으로 불림)에서 서울의 중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전학 온 것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나를 부르더니 너는 서울에 있는 중학교에 가야 한다며 교과서에 마름모 모양의 경기중학교(나는 왜 경기중학교가 경기도가 아니라 서울에 있나 의아해 했다. 그 학교가 소위 최고의 명문학교로 엄청나게 들어가기 어려운 데라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교표를 그려주시면서 상경을 지시했고 시골 오지 학교에 다녔던 나는 서울만 가면 모든 게 다 저절로 이루어지는 줄 알았다. 서울에서 하필 성북동으로 오게 된 것은 이모가 성북동에 살았기 때문이었다. 철암에 위치한 ‘대한석탄공사 장성광업소’에 근무했던 아버지 때문에 가족 모두가 올 형편이 아니어서 나만 우선 이모네로 유학을 오게 된 것인데 그 집은 지금 ‘마전터’라는 음심점으로 바뀌어 있다. 거기서 나의 두렵고도 낯 설은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 집은 언덕에 축대를 쌓아 도로 아래로 지어서 앞으로 성북초등학교가 바라보이고 집 뒤의 길 건너편에는 보성고등학교(지금은 서울과학고등학교로 바뀌었다.) 후문이 있었으며 옆으로 경신고등학교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 길이 바로 한양도성을 쌓은 자리이며 경신고등학교와 보성고등학교는 성터를 깔고 앉아 있었다. 그 뒤 도로 옆에 판자로 지은 만화방이 있었다. 지금 그 자리는 식당으로 바뀌었다. 아, 그 추억의 장소! 시골에서 올라온 터라 친구가 없었던 나는 그 만화방을 무시로 드나들었다. 용돈이라고 받은 돈을 아끼고 아껴 만화를 보는 데 투자하였다. 당시 만화는 우울한 내 삶의 탈출구였다.


  강원도 광산촌에서 왔기 때문에 감히 혜화초등학교 같은 일류학교(!)에는 전학서류를 내지도 못하고 간송미술관 옆에 있는 성북초등학교로 전학했다. 내 기억으로는 5학년 2반이었던 것 같다.

  

  당시는 중학교 시험이 있을 때여서 초등학교 교육은 입시체제로 운영되어 매일 시험을 보았다. 국어, 산수, 사회, 자연, 예체능 순으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시험을 본 다음 그 결과를 가지고 성적순으로 주마다 자리배정을 하는 것이었다. 제일 앞자리는 당연히 반에서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이 차지하고 뒤로 갈수록 성적이 떨어지는 학생들이 배치되었다. 어린 아이들에게 극한 경쟁을 시키는 참으로 잔인한 처사였다.


  나는 강원도 광산촌에서 공부를 제대로 한 적이 없고 더군다나 음악 미술은 배워본 바도 없었다. 시험을 보니 아는 게 별로 없어 당연히 뒷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어린 나이에 느끼는 모멸감은 대단했다. 당시 그 학교 교사였던 이모는 내 성적을 알고 나서는 당장 짐 싸서 강원도로 내려가라고 난리였고, 반 아이들은 촌스럽고 어눌한 강원도 사투리가 신기한지 국어 시간이면 나에게 책을 읽게 했다. 유년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은 다 사라지고 모멸의 시간만이 지속되었다. 나는 강원도로 내려가 아이들과 같이 산을 돌아다니며 산토끼를 잡고 개울에서 물고기를 잡는 꿈을 자주 꾸곤 했다. 낯설고 버거운 서울 생활에 지쳐 내 삶이 고통스럽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남몰래 눈물을 흘린 적도 많았다.


  이 삭막한 서울 생활에서 나를 위로한 건 그 반에서 제일 키가 크고 다리를 저는 최준훈(지금은 고인이 되었다.)이라는 친구였다. 키가 크기에 할 수 없이 뒤에 앉아있었는데 내가 성적이 안 좋아 뒤에 앉게 되어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었다. 그도 소아마비 장애를 가지고 있어 나와 쉽게 어울릴 수 있었나 보다. 둘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낙이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 우리는 시험이 끝난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같이 영화를 보곤 했다. 현재 성북초등학교 앞에 전차 정류장이 있었는데 거기서 전차를 타고 명륜동의 명륜극장이나 삼선교에 있는 동도극장에 가곤했다. 그 추억의 전차는 1~2년 뒤에 사라지게 됐는데 돈암동 태극당 앞에 전차 종점이 있어 그곳까지 전차를 타고 가보기도 했다. 왕우가 주연한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 같은 홍콩 무술영화나 <장고>와 같은 마카로니 웨스턴 등의 영화를 좋아해서 많이 보곤 했다. 일주일 동안 담벼락에 붙은 영화 포스터들을 보고 볼 영화를 선정한 다음 한 주일 내내 절약한 용돈을 과감하게 투자했다. 거기서 삭막한 서울 생활의 위안을 얻곤 했다.



2


  어린 나이에 입시의 멍에에서 신음하던 시기도 끝이 났다. 내가 6학년이던 1968년 서울에서 중학교 시험이 폐지된 것이었다. 죽어라고 공부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중학교 입학시험이 사라졌다. 7월 15일을 기해 중학교 입시 폐지가 발표되었기 때문에 ‘7.15해방’이라고 불렀다. 그 때부터는 그야말로 완전히 다른 삶이 전개되었다. 그 사이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제법 서울 생활에 적응을 해가던 터였다. 입시에 짓눌려 있다 거기서 해방 되니 주변의 풍경들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성북동은 산으로 둘러싸여 서울 같지 않은 곳인데다가 내가 살았던 강원도와도 닮은 구석이 있었다. 게다가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문화적인 명소가 많이 산재해 있었다. 우리의 놀이터는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과 전형필 선생의 집인 북단장(北壇莊)이었다. 학교와 바로 붙어 있기 때문에 무시로 드나들었는데 나중에야 그곳이 국보급 미술품을 보유한 그 유명한 간송미술관인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드나들었을 땐 건물 앞에 너른 포도밭, 입구에 돌사자가 서 있어 이국적인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학교 뒤로도 너른 동산이 있어 도토리를 주으러 자주 담장을 넘었는데 조회시간마다 늘 도토리 주으러 가지 말라고 당부하던 담임선생의 말이 기억난다. 무서운 개가 있으니 담을 넘어가면 큰일 난다고 했지만 개는 묶어 두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시인 백석(白石, 1912~1996))의 연인이었던 자야(子夜) 여사가 주인인 요정 대원각도 어린 시절에 신기한 곳이었다. 산기슭에 고색창연한 집들이 들어서 있고 잘 가꾸어진 정원에서는 밤마다 가야금과 장구 소리가 둥덩 둥덩 들리곤 했다. 당시 친구들과 같이 몰래 들어가 본 적이 있었는데 정말 우리가 접하지 못한 ‘비밀의 정원’이었다. 삼청각, 청운각과 더불어 당시 정치인과 재벌들이 주로 애용하는 곳으로 군사정권 시절 이른바 ‘요정정치’라는 말을 만들 정도로 성업 중에 있었다. 우리들은 나중에 커서 돈을 많이 벌면 여기 와서 같이 술 한 잔 하자고 다짐을 한 적도 있었다. 대원각은 어린 우리들에게는 동화 속에 등장하는 비밀의 장원이었고, 당대 최고의 핸섬 보이였던 시인 백석과 일등명기 자야의 애절한 사연이 스며있는 곳이라는 사실은 당시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 화려했던 대원각이 1995년 법정스님에게 헌납되어 1997년 길상사(吉祥寺)라는 절로 바뀌게 되었으니 정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된 셈이다. 천 억대에 이르는 재산을 아무런 대가 없이 법정스님에게 헌납했고 법정스님도 처음엔 고사하다가 나중에 이를 받아들여 도량으로 개조한 것이다. 게다가 그 주인이었던 자야여사는 1999년 끝내 백석을 만나지 못한 채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길상헌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그 다음 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한다. 그 유골은 유언대로 길상사의 뒤편 언덕에 뿌려졌으니 길상사에 가거든 이들 연인의 이루지 못한 인연이 저승에서 이뤄지도록 빌어보시라.


  지금의 길상사 뒤편으로 소위 ‘도둑촌’이라 하여 한국에서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부잣집들이 즐비했는데 무슨 성채와 같아서 어린 시절 호기심을 한껏 자극했다. 그 뒤 70년대 TV 드라마에 부잣집 하면 으레 성북동이 등장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보다는 그 뒤 산위에 여기저기 박혀 있는 외국 대사관저들이 더 예쁘고 특이했다. 산을 배경으로 숲 속에 들어앉은 여러 나라의 대사관 저택들은 예쁘면서도 이국적이어서 그곳을 보려고 자주 돌아다니곤 했다. 나는 그때 내가 크면 이 아름다운 곳에 집을 짓고 살리라 다짐했다. 나이가 들면서 그것이 불가능한 꿈인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3


  중학교는 최초의 추첨 세대가 되어 삼선교에 위치한 삼선중학교로 배정받았다. 그 무렵 강원도 철암에 있던 우리 집이 이곳 성북동으로 이사 오게 되어 드디어 가족들이 모두 모이게 되었다.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은 쌍다리 위의 서울 명수학교 근처였다. 채석장이 있었고 삼청터널은 없어서 시내로 나가는 길은 나 있지 않았다. 중학교 시절 읽은 시 중에 김광섭(金珖燮, 1905~1977)의 <성북동 비둘기>가 있었는데 우리가 시의 무대가 되는 곳에 산다고 좋아했다.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고 했던 바로 그곳에 둥지를 틀고 살게 된 것이다.


  당시 우리 또래에게 가장 유행하던 것은 무협소설이었다. 지금 유명 작가인 김훈의 선친인 김광주가 쓴 <정협지>, <비호> 등의 작품이 특히 인기가 있었는데 거기에 푹 빠져 나무로 만든 칼을 가지고 허물어진 성터에서 무협 주인공 흉내를 내며 시간을 보냈다. 당시는 쌍다리 위로 산기슭에 많은 집들이 있었고 그곳을 지나 성터로 올라가는 길이 있었는데 성터가 허물어진 채로 방치돼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집이 그곳에서 멀지 않아 학교가 파하면 친구들과 성터를 자주 찾아 놀곤 했다.


  그곳을 올라가는 길에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선생이 말년을 보낸 심우장(尋牛莊)이 있었는데 그곳의 의미를 안 것은 한참 뒤였다. 아무도 우리에게 그곳이 어떤 곳인지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 흔한 안내판도 하나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등학교 가서야 비로소 국어선생님의 말을 듣고 그곳에 만해 한용운 선생의 집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중학교 시절에는 그저 성터로 가기 위하여 그 앞을 무시로 지나 다녔을 뿐이었다.


  아, 그리고 쌍다리 위로 길 옆에 이태준(李泰俊, 1904~?)의 생가인 수연산방(壽硯山房)이 있었는데 그곳은 대학원 가서야 알았다. 이태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었던 시절이어서 그곳은 그냥 오래 된 한옥이 남아있는 곳이라고만 기억했다. 대학원을 가서 국문학을 전공한 뒤에야 그곳이 1930년대 최고의 소설가 이태준의 집인 것을 알았다. 마침 거기서 가까운 성균관대학교에 다녔기에 대학원 시절 비오는 날이면 성터를 넘어가 술과 차를 마시곤 했다.


  이렇게 본다면 성북동의 산동네는 한용운과 이태준, 김광섭 그리고 자야의 애인이었던 백석까지 위대한 근대문학가의 집터와 작품으로 한국 근대문학사의 기억을 환기시키는 곳이다. 다른 지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문학지리적 유산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내가 지금도 성북동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본 동경의 신주쿠에 위치한 와세다 대학을 간 적이 있었다. 대학 앞의 작은 길을 가는데 그 길에 일본의 작가 나쓰메 소세키(夏目 金之助, 1867~1916)의 산책로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생가도 아니고 산책한 길까지 소중히 간직하는 그 자세가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그 정신을 이어받자는 의도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성북동은 엄청난 근대 작가의 영혼을 보유한 셈이다.


  그리고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같이 다닌 송동열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하루는 그 집에 놀러 갔더니 영어로 된 원서가 돌아다녔다. 호기심이 나서 이게 뭔가 친구에게 물어봤더니 그 아버지가 바로 서울대학교 영문과 교수이자 <하여지향>의 시인인 송욱(宋稶, 1925~1980)이었다. 그 송욱 선생이 동구여상 입구 복개천 근처에 살았다. 당시로서는 송욱이라는 시인은 들어 본 적이 없어 그냥 친구의 아버지일 뿐이었다. 오히려 미남인 친구의 형은 여학생들이 줄줄 따라 다녔는데 내가 가면 앉혀 놓고 여학생 사귀는 얘기를 해주었고 나와 친구는 신기해하며 열심히 들었다.



4


  나는 초등학교 5학년에 전학 와서 중고등학교 시절 7~8년가량을 성북동에서 살았던 것 같다. 그 뒤에 집은 수유리 4.19탑 근처로 이사를 가게 되었지만 대학을 성북동 근처인 명륜동으로 다니게 되면서늘 성북동에 가까이 있다고 여겼다. 게다가 대학원을 마치고 경신고등학교 교사로 9년 동안 근무하면서 다시 성북동으로 귀환하였다. 마침 본가도 성북동에 터전을 잡고 다시 오게 되면서 우리 집은 제 2의 성북동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대략 20년 넘게 성북동에 살았던 셈이 된다. 서울에서 유일하게 유년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보낸, 어린 시절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 바로 성북동이다. 해서 성북동은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다. 가게나 커피 집은 많이 생겼지만 동네가 거의 변하지 않은 곳도 성북동이다. 그곳을 지날 때면 늘 정겨움을 느낀다. 사람 사는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파리의 몽마르트 언덕은 산동네라서 오스망 남작이 주도한 도시정비의 칼날을 비켜가서 지금의 아늑하고 정겨운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김광섭은 문명에 쫓겨 성북동 비둘기가 터전을 잃었다고 했지만 지금의 성북동은 개발의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삭막한 아파트촌이 아닌 사람냄새 가득한 정겨운 마을로 남아있다. 성북동 비둘기가 “성북동 주인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그렇게 아름다운 동네로 남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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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긍은 세명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다. 고전소설을 전공하였으며, 문학 평론가이기도 하다. 그는 성북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그 기억이 자신의 삶에 가장 큰 자양분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성북동이라는 말에서 아득한 그리움을 느끼는 그는, 성북동을 떠나 살아도 성북동 사람임에 틀림없다.



※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2호는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2014 마을미디어 활성화사업에 선정되어 사업비를 지원받아 간행되었습니다. 소개된 글은 2014년도에 쓰여져 잡지에 실렸으며, 2017 동 사업을 통해 웹진으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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