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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의 성은 Nov 26. 2020

월세만 됩니다.

응어리 세입자




단 5초 만에 울 수 있는 특기가 있어요. 울어야지 생각하면 울 수 있는 요상한 특기예요.

눈물이 많아요. 조금만 괴로워도 조금만 그리워도 조금만 상처 받아도 금세 울어버려요. 그래서 사람들이 말해요. 넌 가슴속에 찰 응어리 하나 없겠다고.


아니요. 응어리가 더 이상 들어찰 자리가 없어서 나오는 거예요. 자기가 들어앉을 자리 좀 늘려달라고 조르는데, 전 더 이상 응어리에게 방을 빼줄 수 없어요. 지금 월세 들어 살고 있는 응어리만으로도 충분히 눈물을 받고 있거든요.





응어리 세입자들은 요즘 눈물로 월세를 치러요. 호황기여서 한 번도 월세를 밀린 적이 없어요. 60평짜리 큰 집을 갖고 있는 응어리도,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원룸에 사는 응어리도, 단칸방에 모여 사는 오래된 응어리도 월세를 꼬박꼬박 내고 있어요.


가끔씩 응어리들은 이사를 해요. 이 집 저 집 알아보러 다니는 응어리부터, 평생 내 집인 양 눌러앉은 응어리도 있고요. 이제는 지겹다며 아예 집을 빼겠다는 응어리도 있어요. 집을 빼겠다는 응어리에게 왜 나가냐고 물어보니까 이곳에서 살만큼 살았다고 답답하다고 했어요. 계약서를 보니 2년쯤 살았더라고요. 그동안 월세도 꼬박꼬박 냈고, 있는 듯 없는 듯 살던 응어리였어요.


그 응어리를 위해 짐을 쌀 5초의 시간을 줬어요. 그리고 난 울어야지 생각했어요.

2년 동안 이곳에 살았던 응어리에게 잘 가라며 눈꺼풀을 깜빡깜빡 흔들었어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던 응어리는 이제 이곳에 미련 따위 없나 봐요. 다행이에요.





2년을 함께한 응어리가 집을 빼고, 새로운 응어리가 전입 신고를 했어요. 이전 응어리가 살았던 집을 확장해 이곳에서 가장 큰 집을 만들었어요. 큰 방 4개, 화장실 2개, 부엌, 테라스까지 갖췄더라고요. 응어리는 부랴부랴 자기가 짊어지고 온 짐을 풀어놓았어요. 피아노, 침대, 의자, 테이블, 심지어 예쁜 커피잔들까지 진열해놓았어요. 이 집이 마음에 들었는지 응어리는 월세 대신 매매로 이 집을 사겠다고 했어요.


나는 완강히 안된다고 말했어요. 이곳은 월세만 가능한 곳이라고. 평생 매매란 없다고 말이죠.

실랑이 끝에 월세로 확정을 지었지만 이 응어리가 언제 집을 뺄지는 모르겠어요. 나는 이제 새로 온 응어리에게 왜 이렇게 모질게 굴었을까요. 한동안 이곳에서 살겠지만 사는 동안만큼은 잘해줘야겠어요. 한밤에 피아노를 치더라도, 침대를 이리 옮겼다가 저리 옮겼다가 쿵쾅대도 가끔 같이 밥을 먹자고 하면 함께 해야겠어요.





월세만 됩니다 이곳은. 매매는 없어요. 넓은 집으로 혹은 작은 집으로 이사는 가능해요. 물론 이곳을 떠나는 것도 자유예요. 때로는 이곳을 관리하는 것이 힘들어 모든 응어리들이 떠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곳이 존재하는 한 때가 되면 새로운 응어리들이 입주해올 것을 잘 알고 있어요.


아, 깜빡했네요. 오늘은 원룸에 사는 응어리가 이곳을 떠나는 날이에요. 짐을 싸는 중인가 봐요. 얼른 배웅해주고 와야겠어요. 입주를 기다리는 응어리 계약서는 잠시 후에 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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