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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의 성은 Nov 05. 2016

손등에 당신이.

마흔 번째 걸음. 가을, 재회




 코끝에 가을이 스치던 오늘, 오랜만에 덕수궁 돌담길을 찾았다. 한 걸음 두 걸음 돌담을 따라 발을 내디뎠다. 쌀쌀한 바람이 불어와 차가워진 내 손등에 단풍잎 하나가 내려앉았다. 유독 붉고 결이 매끈한 단풍잎이었다. 잎맥도 구부러진데 없이 곧았다.

 단풍잎을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더니 사방이 빨갛고 노랗게 물들어있다.

 '또 네가 왔구나. 내 손등에도 가슴에도 어깨에도 발밑에도.'







 어렸을 때부터 나는 참 가을을 사랑하는 아이였다. 가을이면 예쁘게 옷을 갈아입는 나무 아래에서 소꿉놀이를 했었고, 길가에 핀 코스모스 향기를 맡을 줄 알았으며, 가을밤 맑은 공기에 신이 나곤 했다. 그렇게 혼자 어른이 되던 가을날, 네가 왔다.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인연이라며 네가 왔다.

 너는 따사롭게 내려오는 9월의 햇살을 좋아했고, 볼 위로 스치는 상쾌한 10월의 공기를 즐겼다. 시린 11월의 바람이 불면 말없이 안아주었고, 부슬부슬 비가 오면 같이 맞아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온기를 더하며 빨갛고 노랗게 물들어갔다.

 사랑 따라 추억 따라 함께 물들어 가던 날, 네가 갔다. 바닥에 수없이 쌓여있는 낙엽 사이로 네가 갔다. 잡으려야 잡을 수 없는 것이 인연이라며 네가 갔다. 시간이 다 되었다고, 네가 있어야 할 곳은 가을이어야만 한다고 했다. 몰랐다. 나의 가을이 지나간 줄. 어느덧 내 마음에 눈이 내려 꽁꽁 얼어붙은 겨울이 된 것을 나는 몰랐다.







 그 후 나는 참 사랑에 민감한 어른이 되었다. 가을이 올 때마다 너를 탄다. 너의 곱디고운 모습이 눈에 밟힌다. 너는 한참 동안 내 마음을 울리다가 낮은 곳으로 떨어져 버린다. 수많은 사람들의 발에 밟히기도 하고, 빗자루에 쓸려 커다란 자루에 담기기도 한다. 그렇게 내 눈앞에서 없어졌다가도 매년 나를 다시 찾아온다. 나는 너무 못되게도 그 사실에 안도한다.







 걷다 보니 어느새 정동 교회 앞이다. 같이 지나던 길에 서니, 그때의 기억이 나를 감싼다. 언제까지나 나에게 아름다운 단풍(丹楓)이길 바랐지만, 이제 너는 나의 단풍(癉風)이다. 내가 가을마다 앓는 바람이다. 너는 나를 찾아오기 위해 파란 새싹으로 한 계절을 보내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또 한 계절을 보내고, 진하게 무르익었음을. 어리석게도 네가 떠나고 겨울, 봄, 여름을 지나면서 알았다. 그리고 너를 모질게 앓았다.

 또 한 번 손등에 네가 떨어져 소곤댄다.

 "잘 지내. 내가 돌아올 때까지 건강하길 그리고 나의 고운 모습 잊지 말길."

 나도 너의 가장 붉은 부분에 입술을 대고 답한다.

 "참 유난한 날이었어. 오늘 유난히 너를 앓았어. 볼 수 있는 그리움이 되어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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