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 번째 스며듦.
그 남자를 처음 만났어요. 비가 부슬부슬 오던 10월의 어느 날이었죠. 제가 원래 비 오는 날을 무지 싫어하거든요. 근데 그날따라 집에 있는 게 아까운 거예요. 그래서 잠깐 집 근처 미술관이나 갔다 오자 해서 나갔어요. 집을 나섰는데 생각보다 많이 오는 비에 어깨는 다 젖고, 제 마음도 젖고. 툴툴거리며 미술관에 도착했어요. 일회용 우산 비닐 커버에 우산을 넣으려는데 이것마저 말썽이었어요. 유독 질겼던 그 비닐과 5분 넘게 씨름하는데 어떤 남자분이 도와주더라고요.
"감사합니다." 인사를 전하며 고개를 들었는데, 웬걸. 제 이상형이었어요. 꽤 큰 키에 넓은 어깨, 흰 셔츠를 입은 모습이 길고 길었던 3년간의 솔로 생활을 청산하고 싶게 만들었답니다. 하지만 수줍음 많고 겁쟁이인 전 얼굴만 벌게진 채 부랴부랴 티켓을 끊고 전시를 보러 들어갔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남자 때문이었는지, 그날 본 작품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요. 어느 작가의 작품인지, 풍경화인지 추상화인지, 몇 년도에 나온 건지. 이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어요.
제가 그 남자를 처음 본 순간, 제 작품이 그려지기 시작했으니까요.
그 여자를 처음 만났어요. 그 여자는 우리의 첫 만남이 미술관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 사실은 아닌데 말이죠. 저는 커피를 내리는 남자예요. 그 미술관 근처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있고요. 미술관에서 마주치기 며칠 전, 그 여자가 제 카페에 왔더라고요. 누군가와 통화하느라 저랑 눈도 안 마주치고 연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었네요. 반샷을 뺀 아메리카노에 시럽까지 타서 먹는 모습을 보니 참 귀엽더라고요. 차가운 도시 여자인척 하나 허당인 모습. 저도 모르게 눈길이 갔어요. 요즘 또래들은 모를 것 같은 시집을 읽는 것이 묘하기도 했고.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어느 날, 미술관에 들렸는데 그 여자를 다시 마주쳤어요.
일회용 우산 비닐 커버 때문에 낑낑거리던 모습, 아 허당. 제 우산은 접지도 않은 채 그 여자를 도와주게 됐어요. 눈이 마주쳤는데 그 여자 당황한 건지 얼굴이 상기돼있더라고요. 저는 한마디라도 더 해보고 싶었는데 급하게 전시실로 들어가는 모습에 차마 말을 걸지 못했어요. '인연이면 또 한 번 만나겠지'하며, 전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카페로 돌아갔어요. 그날 몇 잔의 커피가 팔렸는지, 몇 명의 손님이 다녀갔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어요.
제가 그 여자를 처음 본 순간, 제 커피가 향긋해지기 시작했으니까요.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은 너무 고귀한 일이죠. 그런 '사랑'을 글에 다 담을 순 없지만 몇 글자 적어봅니다.
사랑 넘치는 하루 보내세요.
그 여자와 그 남자가 말하는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