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노이는 10월부터 눈이 올 정도로 정말 추운 곳이다.
하지만 8월 말은 추워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고, 여전히 의심의 여지 없는 여름이었다.
변진섭의 <숙녀에게>를 듣다 보니, 가을에 서둘러 온 초겨울 새벽녘이 그리웠다.
일리노이에 오기 전에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계절인 겨울이 길어지겠구나, 기대했는데 아직은 멀었나 보다.
섭씨 38도, 화씨 100도의 날씨가 믿기지 않았다.
아무리 화씨라고 해도 기온이 세 자리 수라니 이게 말이 된다는 건가.
그래도 온몸에 햇빛이 내리쬐어 정신이 없는 와중에,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면 파란 하늘이 보여서 기분이 좋아졌다.
고등학생 시절 마음이 답답해서 바다를 보고 싶을 때 바다 대신 하늘을 보는 습관이 있었다.
내륙 깊숙이 들어와 있는 일리노이에서 바다를 볼 일은 없을 테니 자주 올려다볼 하늘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미술 수업이 열리는 학교 미술관은 벽이 유리로 되어 있어서 로비에 앉아 있으면 쨍쨍한 햇볕을 그대로 받을 수 있었다.
미술관은 학교 소유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규모가 컸다.
현대미술 작가들의 회화 작품뿐만 아니라 고려청자를 포함한 유물도 전시되어 있었다.
한국에서는 학교에 미술대학이 없어서 미술 수업을 들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미국에 있을 때 꼭 들어보고 싶었다.
우연하게도 교수님과 스튜디오 조교님이 모두 한국인이셨다.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역시 수업 방식은 한국과 달랐다.
스튜디오에서 작품을 제작하는 것뿐만 아니라, 리딩과제나 학교 미술관에 있는 작품 중 하나를 골라서 보고서를 쓰는 등 다양한 과제로 구성되어 있었다.
교수님께서는 수업의 목표가 미술에 대한 자신만의 관점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미술이란 무엇일까, 에 대한 자신만의 답을 찾는 것.
미술은 시와 비슷한 것 같다.
한국에서 들었던 시 쓰기 수업에서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시는 삶을 멈추게 하는 것.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 정도의 힘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 사람이 창작자이든 감상자이든, 작품을 만난 후 그의 삶이 이전과 어떤 방식으로든 달라질 때 그 작품을 예술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일상적인 사물에서 시적인 순간을 발견하면 그 대상을 바라보는 눈이 예전과 달라지는 것처럼, 미술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도록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