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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은 Sep 17. 2024

어떤 의사

원래는 일반화학과 일반생물학 수업에서 실험을 경험해야 했지만, 신입생 때는 여전히 코로나로 비대면 수업을 진행해서 직접 실험실에서 수업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뇌를 직접 해부하고 관찰하는 신경해부학 실습 수업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 수업의 학정번호는 MCB 460으로, 역시 400번대 수업이라 나를 제외한 다른 학생들은 전부 4학년이거나 대학원생이었다.

자기 소개를 하는 동안 살짝 움츠러들 뻔했는데, 뒤이은 수업 오리엔테이션을 듣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교수님께서 신경 회로 그림을 공부할 수 있는 해부학 교육 사이트 Draw It To Know It을 알려 주셨다.

지금은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귀엽고 깨끗하게 정리된 그림들을 보자 이 수업을 사랑하게 될 것만 같았다.

수업은 해부학 실습뿐만 아니라 임상 사례 탐구와 논문 리딩, 탐구 보고서와 발표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되었다.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지난주 수업에 대한 복습을 진행하고, 신경해부학과 관련된 창작품을 제작하는 것처럼,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하려는 의도가 느껴졌다.

머릿속으로 그렸던 미국 대학교 그대로의, 가장 미국적인 수업이었다.


랩 수업은 20명 정도의 소규모 인원이고, 조별 실습으로 이루어져서 학생들과 대화를 많이 나눌 수 있다.

4명으로 구성된 우리 조의 학생들은 모두 메디컬 스쿨을 준비한다고 했다.

인사를 나누며 메디컬 스쿨 입시에 대해 궁금했던 점들을 들을 수 있었다.


5월부터 시작되는 입시는 1년 내내 진행된다.

그런데 입시가 끝난 해가 아니라 다음 해에 입학하기 때문에, 4학년 때 시험을 보면 1년 동안 갭 이어라는 휴식 기간을 가진다.

학부에 입학하여 메디컬 스쿨을 졸업하기까지 최소한 9년이 걸리는 것이다.

한국은 학부 제도라서 6년 만에 졸업한다고 설명하자 다들 부러워했다.


학부 입시에서 SAT 점수가 중요한 것처럼, 메디컬 스쿨에 합격하려면 MCAT 시험을 치러야 한다.

그런데 생명과학만 출제되는 것이 아니라 물리학처럼 다른 분야의 지식도 다양하게 물어본다.

그만큼 4년간의 학부 생활 동안 여러 학문을 공부했을 것을 생각하니, 의사 면허를 따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그동안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다는 점이 부럽기도 했다.

다만 한국에서는 학부에 입학할 때만 입시를 치르면 되니까 의학과에 진입하기 위해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었다.


의사를 양성하려는 목적은 같지만, 그 과정의 차이는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의사의 모습이 달라서 생기는 게 아닐까?

미국에서는 의학이라는 응용 학문을 공부하기 전에, 기초 학문에 대한 폭넓고 탄탄한 지식과 학업 외적으로 풍부한 경험을 갖추어야 훌륭한 의사가 된다고 여기나 보다.

반면 한국은 빠르게 의사를 양성하는 것을 더 중요시하는 것 같다.

7년에 달하는 미국의 레지던트 기간과 달리 한국의 레지던트 기간은 4년이고 그마저도 줄어들고 있으니까 말이다.

'어떤 의사'를 양성하고자 하는가는 그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를 반영한다.

그리고 이상적인 의사상은 대학의 교육과정을 결정한다.


다른 전공도 마찬가지이고, 학문뿐만 아니라 생활 곳곳에서도 그러한 가치관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떤 졸업생'을 배출할 것인가에 대한 답이 학생 참여형의 다양한 수업 방식을 만들고, '어떤 손님'을 만족시킬 것인가에 대한 답이 다이닝홀에 비건 메뉴와 할랄 메뉴를 마련하게 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에 대한 답이 나의 생활 방식을 결정하며, 거꾸로 일상생활은 내 가치관을 반영한다.

나는 어떤 의사가 될 것인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그리고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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