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을 읽고 난 후에 알랭 드 보통이 좋아져서 다시 읽은 책이다.
작년 이맘때쯤 읽었는데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많은 일들이 일어난 후에 읽으니까 전에 넘겼던 내용도 새롭게 다가왔다.
사랑이 시작해서 이별에 이르기까지 각 단계에서 인물을 심리를 섬세하게 포착해 내고 그것을 여러 철학자의 서술과 엮어낸 통찰력이 놀랍다.
본문
어떤 사람을 두고 자신의 필생의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 살아보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가 만나고 못 만나는 것은 결국 우연일 뿐이라고, 989.727분의 1의 확률일 뿐이라고 느끼게 되는 순간은 동시에 그녀와 함께하는 삶의 절대적 필연성을 느끼지 않게 되는 순간, 즉 그녀에 대한 사랑이 끝나는 순간이기도 할 것이다.
냉소주의와 사랑이 스펙트럼의 양극단에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가끔 사랑에 빠지는 것은 습관화되다시피 한 맥 빠지는 냉소주의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세상과 삶을 믿고 싶어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게 된 사람이 누구인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최초의 꿈틀거림은 필연적으로 무지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관계를 시작한 다음부터 상대방을 점점 더 잘 알게 되므로, 처음 사랑에 빠진 순간은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이 가장 적을 때이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끌리는 것은 곧 나의 모든 개인적 특징들을 버리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나의 진짜 자아는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완벽성과 화해 불가능한 갈등 관계에 있으며, 따라서 무가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뭉크 전시회에 갔을 때가 떠올랐다. '함께함'은 개인성의 상실에 대한 대가로서만 주어진다고 보았던 화가의 말과 유사한 대목이다.
내가 사랑하는 일에 집중했던 것은 아마도 사랑을 받는 것보다는 사랑을 하는 것이 언제나 덜 복잡하기 때문일 것이며, 큐피드의 화살을 맞기보다는 쏘는 것이,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것이 쉽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나 자기 사랑이 우위를 차지하면, 사랑이 보답받게 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수준이 낮다는 증거가 아니라,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되었다는 증거임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상대가 우리더러 마음대로 살라고 허락한다면 그것은 보통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잔소리의 본질은 사랑이겠지.
우리는 서로에게 친절했을지는 모르지만, 이제 예의는 차리지 않았다.
친밀감과 예의가 반비례한다면 딜레마를 낳겠지만, 예의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고 생각해 본다. <우리는 사랑일까>에 나오는 것처럼, '뻣뻣하게 악수하는 예의'와 '짜증을 부리지 않는 예의'는 서로 다른 것이며, 전자가 없어지더라도 후자는 지켜져야만 한다.
아름다움이 사랑을 낳을까, 아니면 사랑이 아름다움을 낳을까?
아름다움에 관한 주관적 이론은 기분 좋게도 관찰자를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만들어버리므로.
그러나 사랑은 결국 나비 가운데 드문 색깔을 가진 종과 같아서, 종종 눈에 띄기는 하지만 결코 결정적으로 확인되지는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거의 모든 것을 보았다.
그것의 진정한 가치, 호기심이 덜한 사람이나 사랑이 덜한 사람에게는 당연히 의미 없어 보일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서 바로 연인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 라이트모티프들이 만들어낸 친밀성의 언어는 클로이와 내가 둘이서 [정글을 뚫고 나가거나, 용을 죽이거나, 심지어 아파트를 함께 쓰지 않고서도] 하나의 세계 비슷한 것을 창조했다는 사실을 기억나게 해 주었던 것이다.
함께한 시간의 무게를 더하는 것은 라이트모티프들이다. 그저께 밤에 연애 밸런스게임을 하면서 친구들과 9년간 1명과 연애한 연인과 결혼하는 것이 나은지, 1년씩 9명과 연애한 연인과 결혼하는 것이 나은지 얘기했었는데, 20대의 9년간 축적된 라이트모티프들의 무게는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것 같다.
어쩌면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아주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다는 것도. 본질적으로 우리는 사랑을 받기 전에는 온전하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내용은 역시 좋았지만 번역이 많이 아쉬웠다.
어색한 부분도 자주 보이고, 원문을 그대로 직역한 듯한 부분도 눈에 띄었다.
원서를 읽으면 훨씬 좋을 것 같아서, 다음부터 영문 원서인 책들은 원서를 찾아서 읽어봐야겠다.
<Essays In Love>라는 제목부터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보다 훨씬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