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그리워지는 날에는 한국어 전자책을 많이 읽었다.
하루는 <이중 작가 초롱>을 읽었다.
십년도 더 된 이야기인데, 이모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
"그래도, 다른 사람이 너를 무서워하는 것보다는 만만하게 보는 것이 낫지 않니?"
...
대체로 쉽게 보여 부당한 대우를 받느니 차라리 상대를 오들오들 떨게 만드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이 풍길 수 있는 인상을 단 두 가지, 무서움과 만만함 중에서 골라야 한다면, 원칙적으로 후자가 낫다는 것을 이모는 말하려 한 것 같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두려움을 심는 일이 너무 나쁘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사람을 얼고 굳고 작게 만들며 '나까짓 것이 무슨' 하는 자조와 포기를 품게 한다.
어렸을 때부터 늘 순둥한 얼굴이었던 나는 좀 더 카리스마 있는 얼굴을 가지고 싶을 때도 많았다.
그렇지만 요즘은 이게 축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화할 때 편안한 느낌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데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두려움을 심는 일이 너무 나쁘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누군가의 마음에 정말 깊이 가 닿으려는 노력이 있어야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미상 작가님이 젊은작가상을 받으셨을 때 수상집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따로 단편집을 읽으니 인간 사회의 문제를 비유적으로 날카롭게 묘사하는 능력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묘하게 싸한 느낌이 감도는 분위기가 좋았다.
한국을 그리워하는 또다른 방법은 음식이었다
기숙사 책상 선반에는 여기저기서 모은 구호물품이 있었다
한인마트에서 산 김부각과 편의점에서 산 햇반과 김, 남자친구가 보내준 떡볶이와 전복죽, 그리고 내가 아플 때 친구가 준 고추참치, 볶음김치와 블럭 미소된장국.
하루 종일 떡볶이 생각만 한 날 수업이 끝나자마자 기숙사로 와서 전자레인지 떡볶이를 돌려먹었다.
떡을 하나하나 아껴 씹으면서 꾸덕한 양념에 김부각을 찍어먹기도 했다.
쫀득하고 매콤한 맛에 이렇게 행복할 수가 있구나.
청설모가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 정도로는 익숙하지만 볼 때마다 사진을 찍을 정도로는 새로운 날들이었다.
떠나온 날이 멀어질수록 핸드폰 메모장에 적어놓은 먹고 싶은 음식 목록도 길어졌다.
붕어빵부터 시작해서 잡채와 마라탕, 칼국수까지.
이런 순간에 영어책이 위로가 되어주기도 했다.
도서관에서 <A Crying Book>이라는 책을 빌렸다.
자신이 느끼는 고통의 깊이를 언어로 표현해낸다는 건 어려운 일인데, 한 문장마다 작가가 겪은 슬픔과 고통이 녹아 있었다.
작가가 오랜 시간 동안 쓴 책이라더니 그 무게가 느껴져서인지 빨리 읽히지가 않았다.
이유 모를 무게에 짓눌려서 눈물에 잠식되는 느낌을 다른 누군가가 표현한 것을 보니까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in a sense we're all winning
we're alive
I say book.
I mean poem.
I mean the way the landscape suddenly reveals itself in layers, a vertical light shining its connective beam from one moment to the next.
An entry into - an awareness of - a dimension always present.
Not always seen.
I think if I can keep myself alive to it, it will keep me from going under.
We all flicker.
For just a moment, we have moved inside the poem.
그러다가 <욕조에 놓인 방>의 작품 해설 '사랑은 물이 되는 꿈'을 읽고 문득 깨달았다.
물은 뒤섞이며 혼돈이 된다.
그들이 사랑에 실패한 이유는 혼돈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랑은 물이 되는 꿈이다.
흔들려도 좋다.
온통 뒤섞이는 혼돈 속에서 중심을 잃을 것 같아도 좋다.
나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고 물이 되는 꿈을 꾸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