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성호 Mar 31. 2020

김훈의 <칼의 노래>와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성품의 변화


2000년 가을에 나는 다시 초야로 돌아왔다. 나는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과 작별하였다. 나는 내 당대의 어떠한 가치도 긍정할 수 없었다. 제군들은 희망의 힘으로 살아 있는가. 그대들과 나누어 가질 희망이나 믿음이 나에게는 없다. 그러므로 그대들과 나는 영원히 남으로서 서로 복되다. 나는 나 자신의 절박한 오류들과 더불어 혼자서 살 것이다. 

초야의 저녁들은 헐거웠다. 내 적막은 아주 못 견딜 만하지는 않았다. 그해 겨울은 추웠고 눈이 많이 내렸다. 마을의 길들은 끊어졌고 인기척은 없었다. 얼어붙은 세상의 빙판 위로 똥차들이 마구 달렸다. 나는 무서워서 겨우내 대문 밖을 나가지 못했다. 나는 인간에 대한 모든 연민을 버리기로 했다. 연민을 버려야만 세상은 보일 듯싶었다. 연민은 쉽게 버려지지 않았다. 그해 겨울에 나는 자주 아팠다. 

눈이 녹은 뒤 충남 아산 현충사, 이순신 장군의 사당에 여러 번 갔었다. 거기에, 장군의 큰 칼이 걸려 있었다. 차가운 칼이었다. 혼자서 하루 종일 장군의 칼을 들여다보다가 저물어서 돌아왔다. 

사랑은 불가능에 대한 사랑일 뿐이라고, 그 칼은 나에게 말해주었다. 영웅이 아닌 나는 쓸쓸해서 속으로 울었다. 이 가난한 글은 그 칼의 전언에 대한 나의 응답이었다. 

사랑이여 아득한 적이여, 너의 모든 생명의 함대는 바람 불고 물결 높은 날 내 마지막 바다 노량으로 오라. 오라, 내 거기서 한줄기 일자진(一字陣)으로 적을 맞으리.

다시, 만경강에 바친다. 

2001년 봄, 김훈 쓰다



———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납니다. 2000년 어느 날, 한겨레 21에 실렸던 김훈의 인터뷰가. 그 인터뷰에서 김훈은 남성우월주의자처럼 보였고, 거침없이 자신의 입장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온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은 후, 그는 시사저널 편집장을 그만두었습니다. (편집장인지, 다른 직함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습니다)


김훈의 <칼의 노래> 서문은 이와 같은 배경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 고백하듯이, 다시 초야로 돌아왔고, 세상의 모든 정의로운 가치관들에 의해서 재단된 자기 자신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과 작별”하는 것이었고, 홀로 스스로를 감금하여 6개월 남짓한 시간 동안 글을 썼습니다. 


조선왕조실록과 수많은 문헌들의 말들을 작가 자신의 말들로 풀어낸 <칼의 노래>는 이순신의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고 있습니다. 그는 그 감금과 격리의 시간을 통해서, 아산 현충사를 여러 번 다녀 갔으며 난중일기와 실록과 다른 기록들을 통해서 이순신의 마음이 되어 글을 써 내려갔습니다. 


그가 경험한 2000년의 일은 그가 스스로 연민에 빠졌다고 고백할 만큼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는 그 일을 대응하는 방식으로 “초야로 돌아”가는 것과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과 작별”하는 것을 선택해서 하나의 이야기에 마음을 집중하여 하나의 결과물을 이루어내었습니다.  


———-


고통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을 할 것인가는 아주 오래된 질문이고 문제였습니다. 그 고통을 낭비하지 말고 생산적인 일들을 하는 계기로 삼자는 주장이 공허해지기 쉬운 이유는 그와 같은 마음이 다른 사람들의 말에 의해서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고통을 성장의 계기로 삼지만, 또 다른 이들은 고통은 더 큰 절망의 시작이 되기도 합니다. 일종의 순환론적 오류처럼, 마음을 형성하는 문제는 언제나 다루기 힘든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마음이 생기는 것이 하나의 선물로 주어진다는 점입니다. 왜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되었나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의 삶의 총체적인 삶의 여정과 인생의 수많은 일들과 만남이 날실과 씨실처럼 얽히고설켜서 우리의 순간의 생각과 마음을 결정할 것입니다.   


“우리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삶이란 선물로 주어진 것이라고 말해주는 내러티브가 필요하다는 점도 살펴보았다.” 스탠리 하우어워스, 교회됨, 262.
I have also hinted that the self can be held to have sufficient coherence to deal with the diversity of our moral existence only if that self is formed by a narrative that helps us understand that morally we are not our own creation, but rather our life is fundamentally a gift.
- Stanley Hauerwas, A Community of Character, 135.



선물로 우리의 삶이 주어진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주관을 인정하고 고백한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한 우리의 반응과 우리의 마음 역시 우리의 독립적인 이성의 판단에 기반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은혜의 영역이고 하나님의 선물의 영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의할 것은 순환구조가 나타난다는 점이다. 덕스러운 사람이 행위하는 것처럼 행위해야 덕스러워질 수 있지만, 덕스러운 사람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덕스럽게 행위하는 것이다.” -스탠리 하우어워스, 교회됨, 267.
Note that this seems clearly to be circular. I cannot be virtuous except as I act as a virtuous man would act, but the only way I can become a virtuous man is by acting virtuously.
-Stanley Hauerwas, A Community of Character, 139.


어떻게 좋은 습관을 형성하고, 어떻게 삶을 변화시킬 것인가 역시 순환론적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성품을 가진 사람이 좋은 습관을 형성하고 좋은 성품을 강화해 나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에,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마음들이 하나의 기회로 주어지길 소망하며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강조하는 바에 따르면, 도덕적 성품은 “선한 행위를 잘하도록 이끌어 주는 습관”에 의해서 형성됩니다. 다시 순환론적 논증의 방식에 따라서, “습관을 통해 성품을 가지게 되고 특정한 목적에 대한 바른 판단이 가능해” 집니다. 이 순환론을 긍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순환의 고리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반복해서 습관을 형성하고 형성한 습관에 의해 도덕적 성품이 형성되고 강화되는 선순환의 고리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고리 속으로 들어가는 공동체 내의 힘을 하우어워스는 그 공동체의 내러티브에서 찾고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드러내는 공동체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내러티브에 충실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한 공동체의 내러티브는 그 공동체가 표방하는 문서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열망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로마 제국의 시민들이 공유한 내러티브와 이스라엘 공동체가 공유한 내러티브는 그 사회의 가장 강력한 집단적 열망에 의해서 결정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율법과 예언자들의 메시지에 의해서 이스라엘 사회의 내러티브가 형성되는 것은 극히 드물었습니다. 그보다  그들의 생존 욕구와 번영을 추구하는 열망이 그들의 내러티브를 결정하였습니다. 


———-


집단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형성되는 열망을 대한 논의를 잠시 미루고, 한 사람의 마음에 무엇에 대한 열망이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다시 생각해보면, 분명 그것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의 열망”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며칠 전, 한결이가 갑자기 설거지를 하겠다며 점심과 저녁 설거지를 다했을 때 그 마음이 어떻게 형성되었을지 곰곰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제 저녁은 하린이가 설거지를 마무리하였습니다. 어젯밤에 아내와 대화하면서 아이들에게서 받는 감동이 너무 벅찰 정도라고 고백했습니다. 


결단코 억지로 외부에서 강요한다고 해서, 스스로 하고자 하는 마음이 형성되지 않을 것입니다. 강요와 잔소리가 개입하는 그 순간, “스스로 하고자 하는 마음”은 문자적으로도 절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마음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 삶의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선물”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떤 리더십, 어떤 실천, 어떤 권리 주장에 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