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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성호 Dec 28. 2022

사랑하사 보내셨음이라

죄인을 위하여 사랑으로 오신 하나님

 

요한1서 4:7~10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에 빠지면 모두가 시인이 된다

사람들은 사랑하면 왜 시를 쓸까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시를 쓰거나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시를 쓰는 사람들을 보면, 여러분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 우리에게 하나의 답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사랑이 닿으면, 사랑의 터치가 있으면 모든 사람은 시인이 된다.  

왜 그럴까요? 사랑이라는 것이 한 사람을 깊이 생각하고 그 사람을 마음에 두는 것인데 이 

마음에 한 사람을 깊이 사랑하고 마음에 품게 되면, 그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형식이 시 또는 음률을 가진 노래의 형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 또는 노래를 통해서 자기의 사랑을 고백하려고 합니다. 

신형철 <인생의 역사>

저는 오늘 한 시를 여러분에게 소개하려고 하는데요. 이 시는 신영철의 <인생의 역사>라는 책에 등장하는 시입니다. 베르톨트 브레이트의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라는 시입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베르톨트 브레히트)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이 필요해요”
나에게 말했다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이 시는 브레이라는 아마 희곡을 전공하거나 시에 대해서도 아시는 분은 브레이트를 아실 텐데요. 그 브레이트가 쓴 시입니다. 이 브레이트가 사랑하는 연인에게 보낸 시인데 이 시는 독특한 게 시는 브레이트가 썼는데 이 편지 속 “나”는 브레이트가 아닙니다. 브레이트가 자기 연인에게 보낸 편지임에도 불구하고, 브레히트의 연인이 이 시를 아침 저녁으로 읽으라고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이 필요해요 나에게 말했다. 이 “나는” 브레이트의 연인입니다.

“당신이 필요해요” 브레히트 자신이 자신의 연인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자신의 연인이 아침 저녁으로 시를 읽으며 기억하길 바랐습니다.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생각이 들면 나를 소중히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브레이트는 자신의 연인이 이렇게 생각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편지를 작성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나의 존재를 소중하게 여기게 된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필요하다고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브레이트의 시를 신영철 씨가 인용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만 사랑의 강도와 밀도가 서로 차이가 날 때가 있습니다 한 사람은 자기 연인을 사랑하는데 그 사랑을 받는 연인은 그 연인을 사랑하지 않고 필요로 할 때가 있는 거죠.  여기서 사랑의 차이가 발생합니다. 이 사랑의 차이라는 것이 매우 일반적으로 쉽게 우리가 볼 수 있는 익숙한 현상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랑의 차이를 많이 경험합니다.


부모님이 태어난 아기를 사랑하죠. 아기는 부모를 사랑하기도 하지만 이 아기에게 가장 중요한 의식은 부모를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는 아기를 사랑하고, 아기는 부모를 필요로 합니다. 이 사랑이 이상하지 않죠?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비슷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필요로 합니다. 
신영철 씨는 브레이트 시의 원천을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22에서 찾고 있습니다. 소네트 22는 이렇게 되어 있는데요. 


그러니, 아, 내 사랑이여,  그대를 잘 돌보시길 
내가 나 위해서 아니라 그대 위해서 그러하듯이 
세심한 유모가 자기 아이 다칠까 노심 초사하듯 
나 역시 가슴에 그대 품고 우리를 간직하려니
[9] O, therefore, love, be of thyself so wary
[10] As I not for myself but for thee will,
[11] Bearing thy heart, which I will keep so chary
[12] As tender nurse her babe from faring ill.
[13] Presume not on thy heart when mine is slain.
[14] Thou gav’st me thine not to give back again.

누군가를 사랑하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면 나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게 됩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를 새롭게 인식하는 거죠. 그러면서 셰익스피어는 소네트 22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 사랑이여 그대는 그대를 잘 돌봐 주시오 왜냐하면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만큼 당신도 당신 스스로를 사랑하게 하며 여겨달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주는 특별한 의식이 있습니다. 사랑하면 내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하는 사랑은 대부분 완전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람들 간의 사랑은 불안전하고 또 서로 사랑하는 마음의 차이도 있습니다. 사랑이 완전하지 못한데 그 완전하지 못한 사랑에도 질적인 차이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덜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 불안전한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사람들은 사랑 속에서도 죄의 모습을 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사랑은 사랑에게서도 죄가 발견됩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 사랑을 갈구할 때, 나 자신의 이익과 만족을 위해서 타인의 사랑을 갈구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외롭기 때문에, 내가 그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에, 마치 브레이트는 자기 시에서 자기 연인에게 얘기한 것처럼, “당신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의식만 가져도 우리는 나 자신을 좀 소중히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진정으로 완전한 사랑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완전한 사랑 안에서 나 자신을 보게 됩니다. 이 완전한 사랑 안에서 나 자신을 새롭게 발견합니다. “내가 무한하게 완전하신 분으로부터 완전한 사랑을 받고 있고 그분이 나를 필요로 하고 있으며 그분이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이 세상 그 무엇보다 나를 사랑하시는구나”를 깨닫게 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게 될까요? 자신을 사랑받는 자로서 인식합니다. 그러니까 그 이전과 전혀 다른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생깁니다.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자이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특별한 존재인 것을 알게 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천지 창조의 목적>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가치 있게 여기시기 때문에 피조물의 지식과 사랑과 기쁨을 즐거워하신다. 하나님 자신이 이러한 피조물의 지식과 사랑과 기쁨과 만족의 대상이 되시기 때문이다.” 
-조나단 에드워즈, “천지창조의 목적” 중

이 세상에는 가치의 차이가 발생합니다. 사람들은 이 포스트 모던 시대에는 가치의 차이가 별로 없다고 말하곤 합니다. 맛있는 음식도 취향이라는 것이 있어서 나에게 맛있는 음식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 맛있는 음식이 있습니다. 이것은 취향의 차이입니다. 이런 취향의 차이 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착각하거나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슨 오해가 있을까요? 아무리 취향의 차이가 있어도 맛의 절대적 차이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오해입니다. 그러나 맛있는 음식이 많이 있지만 맛의 절대적 차이가 있습니다. 정말로 맛있는 매우 탁월한 음식 솜씨를 가진 요리사가 만든 음식과 그렇지 않은 요리사가 만든 음식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발생합니다. 이것은 취향의 차이로 무마할 수 없는 정도의 차이입니다. 왜 제가 이와 같은 질적 차이를 이야기하냐면, 오늘날 세상에는 이와 같은 질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문화가 만연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종류의 사랑이라 할지라도 아무런 차이가 없고 오직 취향의 차이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문화가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세상 속 문화는 모든 것이 차이가 없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 세상에 있는 제한적이고 부족한 것들과 구별되는, 가장 완전하고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 계시다고 성경은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가장 완전하십니다. 모든 점에서 완전하고 탁월하신 분입니다. 그 사랑에 비교해서 한없이 부족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 가득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의 절대적인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가장 탁월한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지 못하고 그냥 서로 부족한 우리 인간의  사랑으로 만족하며 인생을 살고 끝내자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교회 심방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결혼한 지 10년쯤 되시는 가정에서 아내 되시는 집사님이 연애 때와 같은 감정을 회복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신 후 곧바로 자신의 말을 거두어들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니에요. 그건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냥 서로 싸우지 않고 서로 아끼며 살기만 하면 좋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호르몬에 의한 화학 작용일 뿐이기에 시간이 지나면 6개월 길어도 3년 안에 사랑의 감정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사랑을 정의하고 규정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그와 같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오늘 읽은 요한1서 4장 7절 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신자의 사랑은 결코 호르몬에 의한 화학 작용 정도로 정의될 수 없습니다. 저는 경험적으로도 이를 확신하는데요. 제가 결혼하기 전 또는 결혼한 직후와 지금을 비교하면 제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이 지금이 100배 이상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 마음은 제 아내도 동일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우리가 알면 알수록, 제한이 없으시고 부족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물론 사람마다 생각과 취향이 다르기 때문에 다툼과 갈등이 있습니다.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그 모든 모든 상처와 어려움들을 다 이겨낼 수 있는 것이 과연 인간의 감정으로 형성되는 사랑일까요? 그러면 호르몬의 작용 특별한 어떤 호르몬이 다 사라지면, 남성 호르몬이 사라지고 여성호르몬이 사라지는 어느 시기가 되면 우리의 사랑은 다 메말라버리게 될까요?  물론 세월의 흐름을 거스르기 어렵겠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들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우리 성경에는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되어 있지만 영어 성경과 원어를 보면 “사랑을 받는 자들” Beloved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받은 자들아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은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Beloved, let us love one another, for love is from God

사도 요한이 사람들에게 갑자기 서로 사랑하라고 도덕적인 명령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받은 자들아 너희가 사랑을 받았으니 이제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지만,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가장 온전한 사랑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행복을 측정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한 사람이 받은 사랑의 크기를 측량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로부터 받는 진정한 사랑의 크기만큼 행복한 거죠. 예능을 많이 보고 즐거운 일들이 많이 생기고 놀이동산에 가도 행복한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한 사람의 존재가 이 땅에서 필요하고 의미 있고 가치 있다는 것을 온전히 느끼고 충분히 경험하도록 만드는 데에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시선이 어디를 향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향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 하나님께서 주신 그 사랑 안에서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BTS의 앨범 Love Yourself에 보면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어쩌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게 나 자신을 사랑하는 거야
 

제가 앞에서 소개했던 조나단 에드워즈라는 에드워즈라는 신학자는 기독교 역사에 있는 여러 신학자들 또는 목사님들 중에서 매우 독특하게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긍정한 신학자입니다. 보통의 많은 신학자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는 긍정하지만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긍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매우 부패한 존재이므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나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타인에게 상처와 고통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긍정합니다. 긍정하는 이유는 유일하게 그리고 참되게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 단 하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자기 자신을 참되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BTS의 가사처럼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게 나 자신을 사랑하는 건데 나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려면 나 자신의 삶이 진정으로 행복하게 만드는 길, 그 길을 택해서 나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 사랑은 반드시 타인의 행복을 빼앗거나 타인과 비교해서 자신이 뛰어난 존재가 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타인을 짓밟고 자기 자신을 높이려는 마음으로는 진정 자기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그와 같은 방식은 반드시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기 자신을 열등한 존재로 만듭니다. 어느 순간 타인과 비교해서 자신을 높일 수 있지만, 자기 자신보다 더 뛰어난 다른 사람을 발견하게 될 때 순식간에 열등감을 사로잡혀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이기적인 사랑은 나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우리를 진정 사랑할 수 있는 참된 사랑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 안에서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가장 완전한 사랑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필요로 하시고 나를 가장 온전하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온전히 회복하시기 위하여 나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게 될 듯 나는 그때 진정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을 제대로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열등감에 빠지거나 또는 자만심에 빠집니다. 우월감을 강하게 가진 사람일수록 순식간에 열등감에 빠지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우월감의 원천이 타인과 비교에 있기 때문입니다. 타인과 나의 격차가 자신의 행복의 근거가 될 때, 자신보다 뛰어나고 탁월한 삶을 살아가는 다른 사람을 발견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 사람과의 격차만큼 열등감에 빠진 고통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타인과 비교하여 자신의 행복을 설정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가장 고통스러운 지옥으로 밀어 넣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 가운데 지옥은 실재합니다. 타인과의 비교, 타인이라는 지옥, 스스로 만든 지옥 속에서 살아갑니다.  스스로 행복하기 위해서 발버둥 치지만, 자신을 사랑한다는 이름 하에 자신을 가장 불행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지옥의 고통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사랑을 알려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9절 10절 말씀을 한번 보겠습니다.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하나님을 떠난 인간,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 인간이 자기의 노력과 스스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여 행복에 이르고자 하면 자기 자신을 가장 깊은 고통과 절망의 지옥으로 몰아넣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고통과 절망의 지옥으로 빠져드는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스스로 고통에 빠져 좌절하고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이 일이 바로 성육신, 성탄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사건입니다.
 

C. S. 루이스는 <기적>이라는 책에서 기적을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기적이 무엇이냐면 기적은 자연 세계에서 자연 세계를 뛰어넘는 초월적인 힘이 자연 세계를 간섭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땅 가운데 가장 위대하고 중요한 기적은 무엇입니까? 바로 성육신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영이신 하나님이, 물질로 제한받을 수 없는 하나님이, 이 물질세계 가운데로 오셔서 자연 세계 가운데로 오셔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성육신이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기적입니다. 여러분이 믿고 있는 기독교 신앙은 오직 성육신을 믿는 믿음 위에서 세워집니다. 


I use the word Miracle to mean an interference with Nature by supernatural power. … The central miracle asserted by Christians is the Incarnation.
-C.S. Lewis, Miracles.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스스로 행복하고자 자기 자신을 절망과 고통의 지옥으로 밀어 넣고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사람으로 내려오신 그 사랑을 여러분이 믿을 때 기독교 신간이 시작됩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다른 그 어떤 곳으로도 기독교 신앙이 시작되지 않습니다. 성육신을 제외한, 성육신을 믿지 않는 기독교 신앙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십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산다는 말을 더 정확하게 풀어보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살아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살리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죄로 인해서 하나님 없이도 행복할 수 있고 하나님 없이도 내 인생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우리를, 스스로 지옥 구덩이에 빠져 스스로 고통에 빠져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건지기 위하여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에 대한 모든 형벌을 대신 받으시고 죄에 대한 저주를 모두 십자가에서 받으셔서 죄의 문제를 감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 이름 그대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을 부정합니다. 죄는 하나님 없이도 인간이 단독으로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실 수 없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 이름 그대로 죄의 문제를 감당하셨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께 온전한 사랑을 받습니다. 하나님께 받아들여집니다.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사랑이 있습니다. 이 사랑이 완전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절대적으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고 조금도 제한이 없으면 인간의 사랑으로는 도무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가장 완벽하고 탁월한 사랑입니다. 


사랑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 사랑을 우리가 안다면 이 사랑을 우리가 받았다면 우리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6개월만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3년만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사랑을 알면 알아갈수록 그 사랑을 붙잡고 형제를 사랑하며 자매를 사랑하며 남편을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하며 자녀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사랑이 나를 변화시켰습니다. 그 사랑 안에서, 그 사랑으로 인하여, 내가 오늘도 살아갑니다. 그 사랑의 나를 행복하게 합니다. 그 사랑으로 인해서 내가 나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기적인 사랑, 타인과의 비교를 통한 행복이 아니라 완전하고 가장 탁월한 제한이 없는 그 사랑 안에서 내가 나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으므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이것이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입니다. 이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고 이 사랑을 아는 자마다 사랑을 실천하고 사랑을 전파하고 사랑을 발산하며 모든 이들에게 이 기쁨과 행복을 나누어 그들로 이 사랑을 누리게 하라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대로, 구원의 목적대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원하고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사랑을 받은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사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그 말씀을 기억합니다. 사랑이 여기에 있습니다 가장 완전한 사랑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려고 , 죄인인 우리와 함께하시려 죄의 문제를 감당하시기 위하여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을 깨닫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 모든 청년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탄절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넘쳐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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