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열한백구 Dec 18. 2019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修身齊家治國平天下

휴일의 나른한 오전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을 멍하니 바라봅니다.

이불을 뒤져 TV 리모컨을 찾아들고

채널을 돌려봅니다.


배는 고픈데

밥을 차려먹기는 귀찮고,

미루어 두었던 잡무를 처리해야 함에도

이불 밖을 벗어나고 싶지는 않습니다.

베개에 머리를 기대고

철 지난 재방송을 몇 편 보고 나니

황금 같던 휴일이 금세 지나가버립니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계획했던 휴일의 일과를 되뇌어 봅니다.

애써 괜찮다고 게으른 자신을 달래 보지만,

양치를 하지 않아 찝찝한 것인지

흘려보낸 이불속 시간이 찝찝한 것인지,

하루 종일 뒹굴거렸음에도

전혀 개운하지 않습니다.


저녁 약속이 있음을 깨닫고

샤워를 합니다.

오늘 하루 인연이 없었을지도 모를

물과의 만남입니다.

얼굴을 닦고, 머리를 감고, 몸을 씻습니다.


몸을 말리고 나니

몇몇 집안일이 눈에 보입니다.

약속시간까지 남은 시간을 가늠하고

미루어 두었던 집안일을 시작합니다.

'조금만 더 일찍 움직였으면 다 정리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가득하지만, 탓할 이가 없습니다.


약속 장소로 이동을 하며

못다 한 일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합니다.

다음 휴일로 미루어야 할 일들입니다.


修身齊家治國平天下 

심신을 닦고 집안을 정제한 다음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함


정신을 차렸을 때

몸을 씻었다면, 집안 정리는 충분히 할 수 있었겠지요.

집안을 정리했다면, 어쩌면 휴일을 알차게 보냈을지도 모릅니다.

복권 당첨 무위도식을 꿈 꾸기도 하지만

씻어야 할 이유가 없는 삶을 살게 되면

한 달도 안되어 폐인이 될 것을 잘 압니다.

벗어나고픈 직장생활이 어쩌면 나의 인간다움을

유지해주는 최소한의 장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퇴사를 고민하는 후배가 있습니다.

퇴사하고 한 달쯤 쉬고 싶다고 합니다.

나를 포함한 많은 간호사들의 burn out을 지켜보았기에

퇴사 자체에 대해서는 따로 해 줄 만한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쉼에도 계획이 필요하다고 말해줍니다.

몇 번의 이직을 경험하면서 느꼈던 점입니다.

뒹굴거림이 익숙해져 버리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심지어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고민 끝에 얻은 짧은 휴가를 날려버리기 때문입니다.

(퇴사일에 맞추어 비행기표를 구입하라고

조언했습니다.)


나는 씻어야 합니다.

씻기 위한 이유가 필요하고,

때로는 일부러 만들기도 합니다.

나라를 다스리거나 천하를 평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씻고나야 해야 할 것들이 보이고

하고 싶어 지는 마음도 생깁니다.

그래야 하루를 알차게 보낼 수 있습니다.


오후 5시 첫 양치를 하고
죄책감으로 쓰는 글입니다.ㅜㅜ




매거진의 이전글 낡은 청바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