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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열한백구 Aug 21. 2019

생애 첫 알바.

패스트푸드점 알바 (20여 년 전 아르바이트 기억)

대학 진학을 위해 승선실습을(실습항해사) 중도 포기했고,

성적에 비해 이상이 높아 진학도 실패했다.

그러던 중 롯#리아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때 신문배달을 했었고, 승선실습까지 했으니

첫 사회경험은 아닌데 유독 이 곳에서 일한 기억들이 뇌리에 박혀 있다.


시급 1650원

하루 8시간씩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을 때 받는 월급은 40만원 정도였다.

시간이 지나 진급을 하게 되면 시급이 오르기는 했지만 1950원이 최대였다.

open 조를 하게 되면 한 시간치의 시급을 추가로 준다고 하여

open 조의 막내가 되었다.

지금보다 물가가 저렴했다고는 하지만 40만원은 큰돈이 아니었다.

휴대폰요금을 내고, 차비와 담배값을 제하고 나면

지갑에 현금이 들어있는 날이 한 달 중에 일주일도 되지 않았다.

지금과 같은 노동환경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근무조건이지만,

누구도 부당함을 이야기하지 않았던 시대였다.

당시 경쟁사인 맥도#드에서 엔젤 이라는 것을 시행했다.

셀프서비스가 기본인 패스트푸드점에서 예쁜 여성을 고용하여 고객응대 및

hall관리를 하도록 하는 서비스였다.

롯#리아에서도 비슷한 서비스를 시작했고, 그들의 시급은 2500원이었다.


리더, A, B, C mate 제도

당시에는 롯#리아 아르바이트생에게 계급이 있었다.

물론 나는 제일 아래 등급인 C mate 였다.

시급 100원 차이나는 B mate 가 어찌나 크게 보였던지,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의 순함이 귀엽다.

다른 매장은 모르겠으나, 내가 일했던 매장은 군대식, 수직적 조직구조였다.

상위 mate의 오더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으며, 그들은 말도 안 되는 똥 군기를

잡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미필이었던 그들이 왜 군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지

참 아이러니하다. 근무의 시작과 끝, 휴식시간의 시작과 끝에는

항상 큰소리로 인사를 했었는데, 가령 '### 근무 들어갑니다.', ' ###휴식 들어갑니다.' 같은 멘트가 정해져 있었다.  근무 조중  가장 높은 mate의 OK sign을 받아야 뭐든 행위가 가능했기에 정말 큰소리로 인사를 했었다.


부산경남 매출 1위

매장이 부산역 안에 위치해 있었기에 정말 바빴다.

타 매장에서는 햄버거 오더가 몇 개 단위로 내려졌다면,

여기 매장은 다스 (dozen) 단위로 내려졌다.

타 매장은 레시피와 주방관리에 대해 시험을 친다고 하는데,

여기 매장은 워낙 바빠서 인지 그런 지필 시험은 없었다.

보통 C-mate는 철판에서 패티를 굽는다.

불판의 온도가 182도가 되어야 패티가 맛있게 익는다 것을 그때 알게 되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고기를 잘 굽기로는 둘째라면 서러운 나인데

이때에 단련된 기술들이 아직도 몸에 남아 있는 듯하다.

롯#리아는 남자는 주방, 여자는 포스(POS) 기를 보는 것으로 역할이 고정되어 있었고,

리더 급이 되면, 양쪽을 이동하며 업무를 볼 수 있었다.


3시간 근무에 한 번의 휴식시간.

3시간에 한 번의 휴식시간이 제공되었다.

햄버거 하나를 골라서 먹을 수 있었고,  유일하게 의자에 앉아

쉴 수 있는 시간이었다.(15분 정도)

8시간을 근무하면 두 번의 휴게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두 개의 메뉴를

먹을 수 있었다.




얼마 전 서울에 볼 일이 있어 부산역에서 기차를 이용했다.

그때와는 역의 구조도 바뀌었고, 버거 왕님께 자리를 뺏겨

역사 안에 롯#리아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부산역 재건축 시 메인 출입구가 변경되어, 이제는 구석자리가 되어버린

그곳을 한참 바라보았다.

함께 했던 Open 조 형들의 얼굴이 생각났고,

귀여워해 주던 누나들과 그중에 짝사랑했던 누나의 얼굴을 오랫동안 떠올렸다.

재수 없는 몇몇 얼굴도 함께 떠 올랐지만 이제는 하나의 추억이 되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큰길로 가는 것을  바란다.

그것이 자녀의 정체성에 맞지 않다는 것을 알아도 그 큰길 안에서 흐름에 몸을 맡기다 보면

자연스럽게 성장하며 발견하는  '그 무엇'을 바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돌이켜 보면 대학을 진학하지 않고 군대를 가전까지의 2년 정도의 시간이  아쉽다.

아무런 방향성을 가지지 못했었고, 큰길 주변을 어슬렁 거리며,

타인의 흐름을 지켜보기만 했었다. 그저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물론 그때의 경험 하나하나가 나를 이루고 있는 조각들일 것이고,

하나의 직업을 가지고, 나름 열심히 살고 있는 현재의 내가 보기에는

웃어넘길 수 있는 작은 추억이지만

그저 운이 좋았음을 나는 알고 있다.


어른들의 잔소리가 그저 하는 말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제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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