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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첫 알바.

패스트푸드점 알바 (20여 년 전 아르바이트 기억)

by 비열한백구

대학 진학을 위해 승선실습을(실습항해사) 중도 포기했고,

성적에 비해 이상이 높아 진학도 실패했다.

그러던 중 롯#리아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때 신문배달을 했었고, 승선실습까지 했으니

첫 사회경험은 아닌데 유독 이 곳에서 일한 기억들이 뇌리에 박혀 있다.


시급 1650원

하루 8시간씩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을 때 받는 월급은 40만원 정도였다.

시간이 지나 진급을 하게 되면 시급이 오르기는 했지만 1950원이 최대였다.

open 조를 하게 되면 한 시간치의 시급을 추가로 준다고 하여

open 조의 막내가 되었다.

지금보다 물가가 저렴했다고는 하지만 40만원은 큰돈이 아니었다.

휴대폰요금을 내고, 차비와 담배값을 제하고 나면

지갑에 현금이 들어있는 날이 한 달 중에 일주일도 되지 않았다.

지금과 같은 노동환경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근무조건이지만,

누구도 부당함을 이야기하지 않았던 시대였다.

당시 경쟁사인 맥도#드에서 엔젤 이라는 것을 시행했다.

셀프서비스가 기본인 패스트푸드점에서 예쁜 여성을 고용하여 고객응대 및

hall관리를 하도록 하는 서비스였다.

롯#리아에서도 비슷한 서비스를 시작했고, 그들의 시급은 2500원이었다.


리더, A, B, C mate 제도

당시에는 롯#리아 아르바이트생에게 계급이 있었다.

물론 나는 제일 아래 등급인 C mate 였다.

시급 100원 차이나는 B mate 가 어찌나 크게 보였던지,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의 순수함이 귀엽다.

다른 매장은 모르겠으나, 내가 일했던 매장은 군대식, 수직적 조직구조였다.

상위 mate의 오더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으며, 그들은 말도 안 되는 똥 군기를

잡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미필이었던 그들이 왜 군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지

참 아이러니하다. 근무의 시작과 끝, 휴식시간의 시작과 끝에는

항상 큰소리로 인사를 했었는데, 가령 '### 근무 들어갑니다.', ' ###휴식 들어갑니다.' 같은 멘트가 정해져 있었다. 근무 조중 가장 높은 mate의 OK sign을 받아야 뭐든 행위가 가능했기에 정말 큰소리로 인사를 했었다.


부산경남 매출 1위

매장이 부산역 안에 위치해 있었기에 정말 바빴다.

타 매장에서는 햄버거 오더가 몇 개 단위로 내려졌다면,

여기 매장은 다스 (dozen) 단위로 내려졌다.

타 매장은 레시피와 주방관리에 대해 시험을 친다고 하는데,

여기 매장은 워낙 바빠서 인지 그런 지필 시험은 없었다.

보통 C-mate는 철판에서 패티를 굽는다.

불판의 온도가 182도가 되어야 패티가 맛있게 익는다 것을 그때 알게 되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고기를 잘 굽기로는 둘째라면 서러운 나인데

이때에 단련된 기술들이 아직도 몸에 남아 있는 듯하다.

롯#리아는 남자는 주방, 여자는 포스(POS) 기를 보는 것으로 역할이 고정되어 있었고,

리더 급이 되면, 양쪽을 이동하며 업무를 볼 수 있었다.


3시간 근무에 한 번의 휴식시간.

3시간에 한 번의 휴식시간이 제공되었다.

햄버거 하나를 골라서 먹을 수 있었고, 유일하게 의자에 앉아

쉴 수 있는 시간이었다.(15분 정도)

8시간을 근무하면 두 번의 휴게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두 개의 메뉴를

먹을 수 있었다.




얼마 전 서울에 볼 일이 있어 부산역에서 기차를 이용했다.

그때와는 역의 구조도 바뀌었고, 버거 왕님께 자리를 뺏겨

역사 안에 롯#리아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부산역 재건축 시 메인 출입구가 변경되어, 이제는 구석자리가 되어버린

그곳을 한참 바라보았다.

함께 했던 Open 조 형들의 얼굴이 생각났고,

귀여워해 주던 누나들과 그중에 짝사랑했던 누나의 얼굴을 오랫동안 떠올렸다.

재수 없는 몇몇 얼굴도 함께 떠 올랐지만 이제는 하나의 추억이 되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큰길로 가는 것을 바란다.

그것이 자녀의 정체성에 맞지 않다는 것을 알아도 그 큰길 안에서 흐름에 몸을 맡기다 보면

자연스럽게 성장하며 발견하는 '그 무엇'을 바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돌이켜 보면 대학을 진학하지 않고 군대를 가기 전까지의 2년 정도의 시간이 무 아쉽다.

아무런 방향성을 가지지 못했었고, 큰길 주변을 어슬렁 거리며,

타인의 흐름을 지켜보기만 했었다. 그저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물론 그때의 경험 하나하나가 나를 이루고 있는 조각들일 것이고,

하나의 직업을 가지고, 나름 열심히 살고 있는 현재의 내가 보기에는

웃어넘길 수 있는 작은 추억이지만

그저 운이 좋았음을 나는 알고 있다.


어른들의 잔소리가 그저 하는 말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제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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