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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성호 May 10. 2022

피날레의 시작

스페인 순례길, 까미노 데 산티아고 / Day 28 / 856.32km

    나는 보통 하루가 끝날 때, 그러니까 잠들기 직전에 일기를 쓴다.

    그러나 이 일기는 자다가 깨서 새벽 4시에 쓰는 일기이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끝을 향해 가고 있다. 새로운 시작이나, 희망을 향해 가는 것이었으면 좋겠는데, 끝을 향해 간다는 사실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내가 내 발로 이 행복을 끝내야 한다니. 좀처럼 받아들이기가 어려운가 보다. 물론, 산티아고를 넘어 피스테라까지 갈 것이고, 피스테라를 넘어 이제 나의 일상으로 돌아가게 될 테지만, 그 사실이 위로가 되진 않는다.


    요새 읽고 있는 책에서 죽음은 처음부터 우리 안에 있는 것이라는 표현들을 자주 접한다. 그래, 내 한걸음 한걸음이 끝을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어쩌면 우리는 매일매일 열심히 죽기 위해서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의 루트


    오늘은 포르토마린에서 파라스델레이까지, 24km를 걸었다.


    너무나도 가깝게 느껴졌다. 처음으로 함께 걷는 영준이 형님의 빠른 발걸음이 우리마저 빠르게 만든 것이었을까. 마을에 도착해서도, 밤이 오기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대신에 오늘은 날씨가 정말 흐렸다. 여태까지  좋게  오는 날씨를 피해서 까미노를 걸었는데,  말이 무색할 만큼 오늘은 비가 많이 왔다.


비오는 거릴 걸었어

    이 알베르게는 나의 마지막 알베르게가 될 것이다. 물론, 정확히 따지자면 산티아고에서 머물 숙소도 알베르게이고, 피스테라에서 머물 숙소도 알베르게지만, 산티아고를 도착하기 전까지 만을 생각했을 때, 마지막 알베르게가 될 것이다. 조금 거친 일정을 계획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여기서 자는 알베르게를 마지막으로 산티아고까지 무박으로 걸어 볼 예정이다. 함께 걷는 욱희나 종우, 영준이 형님이 함께 해주시면 좋겠지만, 그들이 반대하더라도 나는 무박으로 걸어볼 예정이다.


같이 걸어줄래 친구들아?


    이것은 한국인 순례자들이 모여있는 오픈 채팅방에서 마지막 100km를 무박으로 걸었다고 말씀하신 어떤 어르신을 보고 세운 계획이다. 하지만, 솔직히 내게 100km까지는 힘들 것 같고, 남은 65km를 무박으로 걸어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겐 오늘 이 알베르게가 마지막 알베르게다.

    왜 이렇게나 무리한 일정을 생각했느냐고 묻는다면, 마지막을 고되게 장식함으로써 보다 큰 성취감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힘들면, 더 값지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생각. 글쎄, 무슨 덕을 보자고 이런 험난한 챌린지를 하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주변의 다른 외국인 친구들에게 나의 계획을 이야기했을 때도, ‘그걸 왜 하냐.’며 다들 같은 반응이었다. 나 스스로도 왜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하나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러나 그건 까미노 자체만 놓고 따져 봤을 때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무슨 덕을 보자고 한 달 동안 800km를 걷는 강행군을 한단 말인가. 왜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느냔 말이다. 글쎄, 그건 무박으로 걸어봐야, 800km를 걸어 산티아고에 도착을 해봐야 깨달을 수 있는 깨달음이겠다. 그러니, 한 번 해보자.


파라스델레이 구경하기, 알베르게에 그려진 zzz표시가 귀엽다


    이렇게 마지막 알베르게라는 생각 때문에, 저녁에 곁들인 와인이 거했나 보다. 아니 곁들였다기 보다도, 저녁시간이 지나고 남은 사람들끼리 한잔 마시는 그 와인이 내겐 너무 버거운 양이었다.

    레온 이후부터는 숙소가 한정적 이어서 그런지, 레온에서부터 함께 시작한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알베르게에 계속해서 머물고 있는데, 그렇게 만난 다른 외국인 친구들과 와인을 나눠마시며 수다의 장이 열렸다. 그리고 그렇게 참 오랜만에 거나하게 취했다.

    그렇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새벽에 일어나서 일기를 쓰는 것이다. 지금 창밖엔 여전히 비바람이 몰아치며, 바람소리와 빗소리가 창문을 거세게 두들기고 있다. 빗방울이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내게 어서 나와 걸으라고 이야기하는 것만 같다.



    아니 근데, 오랜만에 취해서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를 켜놓고 잠들었는데, 도대체 이 등은 누가 꺼준 걸까.

    누가 이렇게도 따뜻하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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