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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성호 May 15. 2022

Last days.

스페인 순례길, 까미노 데 산티아고 / Day 30 / 936.02km

오늘의 루트


    일기를 하루 쓰지 않았다.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3월 1일, 삼일절 아침부터 나와, 다음날 새벽 3시 30분까지. 총 18시간 30분가량을 걸었다.


    한 번 쓰면 지울 수 없는 볼펜 같은 인생이라고들 한다.

    내가 걸어온 이 까미노가 한 문장이라 치자. 그렇다면 나는 그 한 문장에 아주 거대한 마침표를 찍었다.

    찍고 또 찍어서 종이가 헤질 만큼, 아니 먹을 가득 묻힌 붓으로 찍는 바람에 뒷면까지 새까매질 만큼,

    아주 거대한 마침표를 말이다.



아르수아로 가는 길

    다들 머물러서 쉬는 마을, 그러니까 원래로 치면 파라스델레이의 다음 마을인 아르수아에 도착했다. 하지만 나는 체크인을 하지 않았다. 무박으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갈 생각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정말 감사하게도, 나와 함께 걸었던 종우 또한 나의 다짐의 일행이 되기로 결심하고, 나와 함께 체크인을 하지 않았다. 대신 우리는 아르수아에 있는 알베르게에서 함께 걷던 욱희, 안나와 함께 마지막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저녁식사가 끝나는 대로 종우와 계속해서 산티아고를 향해 걸었다. 늘 해가 떠오를 때쯤 하루를 시작했던 것 같은데, 아르수아에서 짧은 휴식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을 때에는, 저물고 있는 해를 볼 수 있었다. 해가 저물건 말건, 방금 막 식사를 마친 우리는 '새로 하루를 시작한 것 같아!', '이런 식이면 끝가지 걸을만하겠는데?' 싶은 생각을 했는데, 참 안일한 생각이었다. 막상 저무는 해를 향해 걷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이미 걸을 만큼 걸었던 우리의 한 걸음 한 걸음의 무게는 남달랐다.

    우리는 보다 금세 지쳤다. 원래라면 쉬지 않아도 될 타이밍에 자꾸만 주저앉았고, 걷는 속도도 좀처럼 빠르지 않았다. 그래도 포기할 순 없었다. 조금 느릴지언정 천천히 한 걸음씩이라는 나의 좌우명을 되새기며, 천천히 앞을 향해 나아갔다. 하지만 이미 해는 저문 지 오래였고, 비가 계속해서 내리는 탓에 체온은 갈수록 식어갔다. 우리는 계속해서 걸으며 겨우겨우 체온을 유지하고 있는 듯했는데, 그때 As Quintas라는 마을을 지나치게 되었다. 어쩌면 우리의 다음 알베르게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한 알베르게의 불빛이 환하게 들어와 있었다. 몸이 한참 식은 탓이었을까, 아니면 먹구름에 달빛마저 가려 꽤 깜깜했기 때문이었을까, 알베르게의 창문을 통해 나오는 조명 빛이 그렇게 따뜻해 보일 수 없었다. 그 빛은 나와 종우를 알베르게 앞에서 멈춰 서게 만들었다.


    그래, 그래도 아르수아를 넘어서 5km를 더 걸었으니 성공적인 거 아닐까?

    여기서 머물면 내일 아침 일찍 산티아고에 도착할 수 있을 테니까 이쯤에서 멈추는 것도 좋지 않을까?

    아니면 여기서 맥주라도 한잔 하고 좀 쉬다가 가면 어떨까?



    우리는 마치 성냥팔이 소녀라도 되는 것 마냥 창문 밖에서 알베르게 안 쪽의 사람들을 바라봤다. 그곳은 굉장히 따뜻해 보였다. 사람들은 여유롭게 빨래를 돌리고, 맥주를 마시면서 오늘의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으며 웃고 떠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 속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한 사람이 보였다. 바로 영준이 형이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당장 뛰어들어가 그를 끌어안고 싶었다. 그런데 창문에 비친 우리의 몰골은 따뜻한 알베르게의 평온을 해치는 사람 같아 보였다. 우리는 결국 알베르게의 현관 손잡이조차 만지지 못하고, 창문 밖에서 영준이 형이 우리를 알아볼 수 있게 열심히 손짓했다.

    다행히 잠시 후에 영준이 형은 창밖에서 비를 맞고 서있는 두 방랑객을 알아봤고, 알베르게 밖으로 뛰쳐나왔다. 우리는 그를 얼싸안으며 그에게 어리광을 피우듯 우리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우리는 아르수아에서 멈추지 않았어요.', '우리는 지금 산티아고까지 갈 거예요'. 글쎄, 짧은 시간 동안 정신적 지주로 발돋움했던 영준이 형을 만나서였을까, 순간 자신감이 생겼다. 원래는 알베르게에서 쉬었다 갈까를 고민하던 우리 었는데, 반대로 우리는 그와 함께하기 위해 그를 유혹했다. 우리의 그런 유혹에 그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본인의 짐을 챙겨, 우리와 같이 우비를 입고 알베르게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우리는 셋이서 함께 걸었다.



    유독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었다. 게다가 비까지 쏟아져서 이걸 태풍이라고 해도 믿을만한 그런 날씨였다. 그러고 보니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태풍이 온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던 거 같기도 한데, 아무튼 그런 날씨를 헤치며 걸었다. 가로등 하나 없는 길을, 드문드문 지나가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와, 우리 머리에 달려있는 헤드라이트 하나에 의지해가며 말이다.

    걷다가 밤늦게까지 열려있는 카페에 잠시 들러 재정비를 하는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다. 우리의 신발은 이미 빗물로 가득해 물이 찰랑찰랑거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카페 안에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 카페의 안쪽에 들어가서 쉬었더라면 조금 더 따뜻했겠지만은, 아까의 알베르게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몰골은 환영받을 만한 것이 못되었다. 가게 안 쪽에선 축구팀 레알 마드리드와 FC바르셀로나의 엘 클라시코가 한창이라 떠들썩한데, 그런 그들의 평온을 방해할 순 없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한밤중에 테라스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참, 가게 안쪽에서 열기 넘치게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모습과, 우리의 모습이 완벽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우리 안의 마음도 나름대로 떠들썩했나 보다. 우리는 비바람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패잔병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누구보다 멋진 도전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의 마음도 꽤나 떠들썩했던 것이다.


테라스에 앉은 우리
마음만은 떠들썩한 우리


    비는 좀 멎었지만 바람은 여전했다. 서로 거리가 벌어져 걷고 있는 상황에, 앞쪽에 있는 사람을 부르려면 아주 큰 소리로 불러야 할 만큼 아주 거센 바람이었다. 문득 셰익스피어의 작품 <리어왕>에 나오는 리어왕의 독백 대사가 떠올랐다. “바람아 불어라! 내 뺨이 갈기갈기 찢어지도록, 모질게 불어라!...” 글쎄, 우리에게 불어왔던 바람이 리어왕에게 닥쳐온 시련처럼 모질었던 것은 아니었을 테지만, 그런 바람으로 인해 살아있음이 느껴졌다. 그래도 나라는 사람이 이 길 위에 존재함으로써 이러한 시련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존재를 실감하려던 행위였을까, 큰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못 불러도, 삑사리가 나더라도 비웃는 사람이 없었다. 아니 내 노랫소리는 바람이 전부 가져갔기에,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내 안에 있는 모든 걸 몸 밖으로 배출해내고 나니, 왠지 모를 카타르시스도 느꼈다.




    이제와 그날을 돌이켜보며 하는 이야기지만 혼자라면 못할 짓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만일 나의 뜻을 함께할 동지가 없었더라도, 나는 똑같은 선택을 했기야 했겠지만은, 그들 덕분에 더욱 힘을 내서 걸을 수 있었다. 사실 욱희와 종우보다 짧은 시간을 함께한 영준이 형이었지만, 그는 나에게 정신적 지주였다. 처음엔 단순히 무서운 속도로 하루를 걸어내는 그의 모습이 멋져 보였던 것뿐인데, 그가 가진 매력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하루는 그와 같은 숙소에 머물며 맥주를 한잔 마시는데, 그와의 대화를 통해 나는 참 묘한 감정을 느꼈다. 나의 깊은 마음속을 이해받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아마 그가 나의 이야기를 정말 진심으로 들어줬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그는 나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아쉽게도 함께 걷지 못한 욱희, 그리고 나와 마지막 챌린지를 함께해준 종우는 나의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글쎄, 나름대로 나이 차이가 있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존중하고 잘 따라줬다. 하지만 그것만을 가지고, 그러니까 내 말을 잘 들었다고 해서 지원군이라고 말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나는 되려 나보다 어린 친구들이 오히려 나보다 성숙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 덕분에, 더 성장했다. 앞으로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들게 만들어준 친구들이다. 방식이야 어찌 되었건 그들 또한 내게 정신적인 지원을 해줬다. 물론 그들에게 받은 물리적인 지원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욱희의 백숙은 물론이거니와, 나의 물집과 햇빛 알레르기를 정성스레 봐주던 종우의 모습도 잊을 수 없다.


    그래, 그렇게 그들 덕분에 나는 산티아고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처음엔 분명히 혼자서 도착하는 모습을 생각했는데, 내 주위엔 사람들이 있었다. 실제로 영준이 형, 그리고 종우가 내 옆에 있었고, 함께하진 못했지만 여러모로 서로 의지하며 여태 함께 걸어준 욱희까지 내 옆에 함께였다. 그렇다. 나 혼자 산티아고에 도착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산티아고에 도착했다.



드디어 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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