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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성호 May 16. 2022

Anyway, I'm here

스페인 순례길, 까미노 데 산티아고 / Day 30 / 936.02km

마지막 일정


    일기를 하루 쓰지 않았다.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3월 1일, 삼일절 아침부터 나와, 다음날 새벽 3시 30분까지 총 18시간 30분가량을 걸었다.


    한 번 쓰면 지울 수 없는 볼펜 같은 인생이라고들 한다.

    내가 걸어온 이 까미노가 한 문장이라면, 나는 그 한 문장에 아주 거대한 마침표를 찍었다.

    찍고 또 찍어서 종이가 헤질 만큼, 아니 먹을 가득 묻힌 붓으로 찍는 바람에 뒷면까지 새까매질 만큼,

    아주 거대한 마침표를 찍었다.  




다음날 아침 산티아고 대성당을 향해 조금 더 걷는 우리.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우리의 기나긴 야간행군 끝에 산티아고를 대표하는 '산티아고 대성당'을 보지는 못 했다는 것이다. 마을의 초입부터 성당까지 거리가 꽤 있었는데, 시간이 꽤 늦은 탓에 마을 외곽에 있는 숙소만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무엇보다, 너무 지쳐있었다. 산티아고에 도착했다는 사실은 발걸음을 더욱이 무겁게 만들어서 산티아고 성당까지 걸어갈 힘이 없었다. 만일 걸어갔다고 한들, 산티아고 성당 앞에서 노숙을 해야 하는데, 그럴 수 있는 체력 또한 없었고 말이다. 그렇게 산티아고 시내와 좀 거리가 있는 호텔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 남은 2km가량을 조금 더 걸었다.


    이제 정말, 드디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도착했다.


    그런데, 일정의 끝에 성당을 두지 않아서였을까 생각보다 벅차오르는 감정이 없었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생각한 만큼 개운한 기분도 들지 않았고, 성취감도 없었다. 산티아고 대성당을 앞에 두고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들은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한 생각들이었다. 예를 들면 '증명서는 어디서 받지?', '오늘 숙소는 어디가 좋을까?' 같은 것들 말이다. 한 달 내내 꿈속을 걸었는데, 막상 내가 마주한 것은 현실이었다.

    나보다 앞서 걸었던 사람들, 그리고 우리 뒤에 따라온 사람들이 삼삼오오 성당 앞에 모였고, 그들에게 ‘we made it!’을 외쳐가며 웃어 보였지만, 기쁘지 않았다. 도착하면 야곱이 선물을 하나씩 줄 거라던데, 도대체 그 선물이 뭔지도 모르겠고, 뭔가 깨달음을 얻는 기분도 들지 않았다. 시간이 잔뜩 지나고 나서야 뭔가 얻어지는 게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만 있었을 뿐이다.



    아무튼, 여기에 왔다.


    걸으면서 문득 ‘이 또한 지나가리라' 같은 긍정적인 순간에는 자만하지 않게, 부정적인 순간일 때는 슬픔에 깊이 빠지지 않는 중립적인 문장이 또 어떤 게 있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사실, 다음 타투는 뭐가 좋을까 고민하며 생각해본 것이긴 한데, 아무튼 그렇게 생각해낸 문장이 ‘Anyway, I’m here’라는 말이었다. 이 말은 긍정적인 순간에 ‘아직 여기다.’라는 의미를 가진 이 문장이 나를 더 나아가게 만들어 자만에 빠지지 않게끔 만들 것이다. 그리고 부정적인 순간에는 ‘일단 이만큼이나 해냈다.’는 의미로 바뀌어 슬픔에 빠지지 않게 달래줄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아무튼 나는 여기에 왔다.





    왜 이런 도전을 하냐고, 그러니까 왜 무박 행진을 하냐고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내게 물어 왔었다. ‘Are you crazy?’, ‘It’s stupid things’ 등등 왜 바보 같은 짓을 사서 하냐는 반응이 많았다. 맞다. 어찌 보면 참 바보 같은 짓이다. 그런데, 내가 걸어온 까미노 또한 누군가에게는 참 바보 같은 짓처럼 보일 것이다. 글쎄, 이게 정말 어떤 가치가 있는 일인지, 무엇을 위한 일이었는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냥 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했을 뿐이고, 덕분에 아주 멋진 경험을 했을 뿐이다. 평생에 잊지 못할 추억을 하나 만들었다. 그래, 어떤 가치가 있는 일인지 무엇을 위한 일이었는지는 아직까지 모르겠지만,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었다는 사실만큼은 참 만족스럽다. 이 추억의 유효기간이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오랫동안, 어쩌면 평생 동안 이 추억을 배터리 삼아 인생을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더 큰 가치, 그러니까 까미노를 걸으며 깨닫게 된 깨달음 같은 것들은 정말 잘 모르겠다. 분명 있기야 있겠지만은 여기에 나열할 수 없는 추상적인 것들이고, 잘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그러나 언젠가 고민스러운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때, 이 까미노를 걸을 때의 기억이 물씬 생각나면서 좀 더 나은 쪽으로 선택할 수 있지 않을까. 까미노라는 배터리를 끼웠으니, 나도 모르는 새에 배터리가 내게, 나의 삶에 작용하는 순간들이 분명 있기야 있을 것이라는 그런 막연한 기대를 해본다. 그런 의미로 서라면 참 가치 있는 일을, 참 나를 위한 일을 해냈다.


    그래, 아무튼 나는 여기까지 왔다.


종우와 나 / 먼저 도착해있던 형석이와 이리나 / 밤늦게 도착한 욱희와 안나


    지나간 힘들었던 순간들을 이겨냈지만 산티아고가 끝은 아니다. 물리적으로만 따져봐도 피스테라까지 더 가 볼 계획이 남아있다. 하지만, 단순하게 더 걸어야 할 길만이 남은 것은 아닐 테다. 이 까미노가 끝났음에도, 내 인생은 더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문득 몸서리치게 느껴진다. 정말 고생 많았지만, 아직 할게 많은 기분이 든다. 지나온 날들에 감사하고, 닥쳐올 날들을 까미노를 배터리 삼아, 까미노에서 알게 모르게 깨닫게 된 사실들을 교훈 삼아 더 멋지게 살아내자. 닥쳐올 날들을 더 넓은 가슴으로 안아주자.



"

    이제와 돌이켜 생각해봐도, 한 달 동안 걸어서 산티아고 대성당 앞에 도착했던 일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도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한 것도 크게 봤을 땐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기 때문이 아닐까. 분명 끝이었다. 그러나 내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절대로 끝이 아니다. 나는 말 그대로 그 시간 그 자리에 존재했을 뿐이다. 어쩌면 내가 'Anyway I'm here.'라는 말을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말을 잘 실천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날, 그 시간, 그 자리에 존재하긴 했다. 그러나 어찌 됐건 그걸 발판 삼아 나는 또 얼마간의 시간을 걸어왔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무언갈 향해 (무언가가 뭔지 아직도 모르겠지만) 나아가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보면, 그래, 'Anyway I'm here.'의 정신을 잘 이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오늘의 이 시간도 마찬가지겠다. 오늘, 이곳에 나는 'Anyway, I'm here.'로서 존재할 뿐이다. 내가 지나온 시간이 어땠건 간에, 지금 나는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니, 'I'll be there.'가 될 수 있게, 또 앞으로 나아가야 함을 느낀다.

                                                                           "


    Buen Camino mi amigo Seong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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