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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성호 Apr 25. 2022

Anyway, we are here

산티아고 순례길, 까미노 데 산티아고 / Day 26 / 786.3km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사회적 동물로서, 그 의무를 다하고 싶었다. 그렇게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의식하다 보니, 그 관계 때문에 꽤나 골머리를 앓았던 하루다.


오늘의 루트


    오늘은 오세브레이로에서 Samos(사모스)까지 이동했다.


    사모스까지 이동해 오는 데에 두 번이나 두 갈래 길이 만났고, 우리는 그 갈래길마다 선택을 해야 했다. 그런 선택의 결과로써 지금 사모스에 와 있는 것이고.


오세브레이로에서 출발하며, 그리고 만난 첫번째 갈림길.


    두 갈래 길의 첫 시작은 오세브레이로에서 출발할 때부터였다. 메인 루트와 서브 루트로 나누어져 표시가 되어 있었는데, 걷는 거리의 차이가 크지 않아 우리는 그냥 메인 루트를 선택했다. 그리고 두 번째 갈림길은 오늘의 목적지가 될 수도 있었던, 오세브레이로에서부터 21km 지점에 떨어져 있는 트리아카스텔라라는 마을에 있었다. 이 마을로부터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진다. 어찌 됐건 둘 중에 어느 한 길은 희생되어야 했다. 한 번에 두 길을 걸을 순 없으니까 말이다. 그저 내가 걸어온 길이 조금 더 쉽고, 조금 더 멋진 풍경을 가진 길이었기를 바라는 수밖엔 없었다.

    첫 번째 갈림길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언급했던바와 같이 거리도 큰 차이가 나지 않았고, 결국엔 금방 다시 트리아카스텔라에서 모이게 되는 길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트리아카스텔라에서의 선택은 경우가 달랐다. 거리 차이도 크게 났고, 이미 21km를 걸은 상태로 만나게 되는 갈림길이라, 몸에 무리를 줄 수 있는 선택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두 갈림길 전부 결국에는 사리아라는 마을에서 만나게 되는 길이긴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마치 요새 유행하는 밸런스 게임처럼 한쪽 길을 쉽게 선택할 수가 없었다. 한쪽 길은 거리가 긴 대신에 사리아로 가기 전에 한 번 쉴 수 있는 마을인 ‘사모스'가 있는 길이었고, 다른 한쪽 길은 사리아까지 직행하는 길이지만 쉴 수 있는 마을이 없는 길이었다. 쉬었다가 갈 것이냐, 무리를 해서라도 빠르게 갈 것이냐. 우리는 선택을 해야 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의 선택은 사모스였다. 사리아까지는 하루 동안 걷는 거리의 양이 너무 많아서 못 갈 테지만, 그렇다고 트리아카스텔라에 머물기엔 오늘 하루 걸었던 양이 만족스럽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우린 돌아가더라도 조금 더 걸어서 사모스까지 가기로 했다. 사모스에서 하루를 묵는 대신 우리는 사리아를 넘어 그다음 마을인 포르토마린까지 직행할 것이다. 그 편이 훨씬 더 우리의 템포와 맞는 선택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길을 걷다가 들린 식당 앞에서, 제레미 욱희 그리고 강아지(?)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 까미노를 걷기 시작한 이래로, 동행이 없었던 날은 거의 없다. 계속 멤버가 추가되고 바뀌었을 뿐, 혼자였던 시간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생장부터 함께하던 동행들과 떨어진 이후에 욱희만이 남아 나와 함께 걸었고, 어느 순간 종우를 만나 늘 우리 셋이서 함께 걷고 있다. 그리고는 언제부턴가 러시아에서 온 안나 또한 우리와 함께 걷게 되었는데, 그렇게 우리는 패밀리가 되었다. 안나 본인은 코리안이 아니면서 우리를 코리안 패밀리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그렇다 우리는 코리안 패밀리였다. 안나, 욱희, 종우, 나, 넷이서 함께 하나의 그룹을 만들어 늘 하루를 함께 걷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내가 굉장히 관계지향적인 사람이라 이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으나, 그룹에 속해 있다 보면 나름의 책임감이 발생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서로가 서로를 보호해야 하고, 본인의 페이스를 희생해가며 남들과 보조를 맞추는 것 이것이 우리 그룹 내에서의 책임이다. 사실 우리 그룹에서 안나를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은 그래도 남자니까 조금 더 멀리, 조금 더 빨리 이동할 수 있기야 하다. 하지만 안나 또한 우리의 멤버가 되었고, 우리가 그룹으로 존재하는 이상 안나와 함께 해야 한다는 책임이 생겨버린 것이다. 이런저런 일들로 그룹이 깨지기 전 까진 서로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며 함께 까미노를 걸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안나와 함께 사모스까지 가기로 우리는 아침에 선택을 했다. 이것은 나름대로 안나를 배려한 선택이었다. 우리는 무리를 해서라도 사리아까지 갈 용의가 있었지만, 안나를 위해서 우리의 페이스를 늦춰 사리아까지 가는 게 아닌 중간 마을 사모스에 머무는 걸 선택하게 된 것이다. 분명 사모스까지 걷는 거리 또한 30km가 넘는 거리라, 안나도 힘들었을 텐데, 그녀 또한 우리의 배려를 느꼈는지 사모스까지는 함께하겠다고 약속하게 되어, 우리는 사모스를 선택했다.


코리안 패밀리 + 제레미, 데미아노

    그렇게 우리는 같은 계획을 가지고 동시에 하루를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욱희와 종우는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훨씬 앞질러서 가고 있었다. 나와 안나만이 뒤편에 남아 길을 걸었다. 안나의 걸음걸이가 너무나도 느렸기 때문이다. 느리게 걸어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는 걸 분명 잘 알고 있다. 안나도 그걸 아는지, 걷다가 멈춰서 구경하고, 걷다가 멈춰서 풀을 뜯어먹는 소도 ‘음메 - ’하며 불러보고 그렇게 시간을 잡아먹으니, 도통 욱희와 종우의 걸음걸이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물론 안나 덕분에 나도 더 많은 것을 구경할 수 있었겠지만 나는 이 일이 속으로 너무나도 불안하고 답답했다. 욱희와 종우를 따라가야 할 것 같은데, 안나는 내 옆에서 천천히 걷고 있고, 걷다가 주변을 구경하는 일들이 즐겁긴 한데, 이렇게 걷다간 해가 다 지고 나서 사모스에 도착할 것 같고. 도대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내 마음속에 또 다른 갈림길이 생겨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지나가는 강아지의 화장실이 되어버린 나의 가방을 망연자실하게 지켜보는 나 / 사진을 찍는나 / 제레미야 안나를 부탁해


    결국 나는 안나를 포기했다. 첫 시작을 우리와 함께하다가 뒤편으로 쳐졌던, 프랑스에서 온 제레미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우리를 따라잡고, 안나를 만나 트리아카스텔라에서 함께 머물러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안나를 챙겨 줄 사람이 있으니,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적절한 타이밍을 골라 안나와의 격차를 벌렸다. 혼자서 속도를 높여, 욱희와 종우를 따라잡아 보고자 열심히 걸었다.

    그렇게 걷고 있는데, 앞 쪽 벤치에 무언가가 올려져 있는 걸 발견했다. 욱희와 종우가 나와 안나를 기다리다가, 본인들의 간식을 쪽지와 함께 놓고 간 것이었다. 나는 그 벤치에 앉아, 그들이 남겨놓은 간식을 먹으며 현재 우리 그룹의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궁금해져 핸드폰을 꺼내 데이터를 켰다. 아뿔싸, 메시지를 확인해보니 안나가 우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제레미를 마다하고 혼자서 사모스로 걸어오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마음도 모르고, 혼자서 걸음을 재촉했다는 사실이 굉장히 미안해졌다. 그렇게 미안함을 품고, 안나가 올 때까지 벤치에 앉아 기다렸다. 욱희와 종우에겐 날 기다리지 말고 먼저 사모스로 넘어가서 음식을 준비해두면, 내가 안나를 챙겨서 사모스로 가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계속해서 안나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녀는 한참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다. 나의 메시지에 어느 누구도 답장이 없었고, 1시간이 지나고, 2시간이 지나 이제는 더 이상 지체하면 안 될 것 같은 타이밍에, 나는 왔던 길을 돌아갔다. 안나를 다시 만나 내가 옆에서 페이스 메이커를 해주며 조금 빠르게 사모스로 걸어 볼 심산이었다. 그러나 다시 갈림길까지 걸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안나는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가 호기심을 품고, 또 안나를 챙기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안고, 혼자서 쓸쓸히 사모스로 왔다.


지나가는 길에 만난 팬케이크 할머니


    그런데, 사모스에 도착해보니 안나가 있었다. 안나는 본인이 다른 길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러다간 우리에게 누가 될까 봐 조금 빨리 가야겠다는 생각에 히치하이킹을 하여 사모스까지 넘어온 것이었다. 하지만 안나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마치 넋이 나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도착한 나,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욱희와 종우를 끌어안고 눈물을 보이기까지 했다. 안나의 사연을 들어보니, 히치하이킹으로 만난 사람의 차에서 대마초 냄새가 아주 찐하게 났으며, 그 남자 운전자가 안나에게 건네는 말들이 아주 외설적이었다고 한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 숲으로 끌려들어 가 겁탈을 당할 것 같은 위험한 상황 속에서 그녀는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사모스까지 온 것이었다. 다행히도 운전자가 상상 속의 위험천만한 일을 행동으로 옮기진 않았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을만한 상황이었고, 어쩌면 나 때문에, 그리고 우리 때문에 안나가 그런 위험 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 위험 속에 우리의 그룹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안나를 진정시키고 달래기 위해 했던 말이 아직도 잊히지가 않는다.

    “Anyway, we are here”


    그래, 아무튼 우리는 여기에 모였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우리 코리안 패밀리가 결국에는 이렇게 약속을 지키고 약속했던 사모스에 모였다. 우리라는 표현이, 그리고 여기라는 표현이 문득 더욱 진하게 느껴지는 밤이다.


사모스에서 현금을 인출하고 있는 안나 "후... 너 때문에.... 아니다... 우리가 미안해"

    그룹 내에서 책임을 다하지 못해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한편으론 불편하다는 생각도 든다. 나의 여행은 분명히 혼자가 되어보고자 시작한 여행, 모든 사회적 역할을 내려놓고, 온전한 나 자신은 누구인지 마주하기 위해 떠나온 여행이다. 그러나 여행을 거듭하며 사회적 역할이 계속해서 생기고, 책임져야 할 것들이 생기고 있다.

    그래도 뭐 이런 일 저런 일 다 겪으며 성장하는 게 그래, 이게 여행이겠지. 언제까지 함께하게 될 동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관계들 속에서도 분명 얻는 게 있으리라 믿는다. 여태 받은 배려들과 도움들을 갚는다는 생각으로 이 그룹 내에서 끝까지 책임을 다 하는 것이, 어쩌면 내게 주어진 일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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