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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성호 Apr 18. 2022

희생 된 기회비용을 기리며

스페인 순례길, 까미노 데 산티아고 / Day 25 / 749.8km

오늘의 루트


    항상 햇살이 어느 정도 남아있을 때 다음 마을에 도착하곤 했다.

    그러니 샤워를 마치고 그 햇살에 머리를 말리는 게 하루 일과 중에 하나로 자리 잡았었는데, 오늘은 해가 거의 다 떨어져 갈 때쯤 숙소에 도착하는 바람에 헤어드라이어의 인공 바람으로 머리를 말려야 했다.


    오늘의 목적지는 오세브리오. 비야프랑카델비에르소부터 대략 28km 정도 떨어진 곳이다. 워낙에 유명한 곳이라서 이곳에서 하루를 보내고 넘어가기를 원했는데, 마침 운이 좋겠도 열려 있는 알베르게가 하나 있었다.

    이 숙소는 따뜻한 게 아주 맘에 들었다. 오세브리오라는 마을이 꽤나 고지대에 있어서 그랬는지 걷는 내내 좀 추운 기운이 온몸에 감돌았는데, 몸이 사르르 녹는 기분이 들고, 오늘 밤은 아주 포근한 밤이 될 수 있겠다.


우리와 안나, 그리고 라치카

    아주 천천히, 아주 느릿느릿 걸었던 하루다. 욱희, 종우와 함께 수다를 떨며 천천히 걸었던 것도 있지만, 오늘은 러시아에서 온, 그리고 지금은 독일에 살고 있는 안나와 함께 길을 걸었다. 글쎄, 나의 영어 실력이 독일에서 영어 선생님을 하고 있는 안나가 듣기에 유창하진 않았을 테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음에 만족스럽다. 그래 봐야 잠깐의 시간이지만, 우리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는 다른 나라 사람과의 대화라 그랬는지, 한편으로는 대화가 흥미로웠고, 그 때문에 재밌었다. 러시아를 여행하며 메모해뒀던 러시아도 써먹고, 대학교 교양 수업 시간에 배웠던 독일어도 써먹고, 특히나 나의 전공이 연극전공인 탓에, 러시아의 유명 희곡작가들의 이름을 대면서 안나의 반응을 살피는 일이 재밌었다.


    ‘두 유 노’로 대화를 시작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관심사를 교환할 수 있는 아주 좋은 방식이니까 말이다.


오세브리오에 도착한 우리, 그리고 욱희


    오세브리오라는 마을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오세브리오가 까미노에서 유명한 곳이기도 했고, 오세브리오라는 이름이 아주 맘에 들었기 때문이다. 괜히 오! 세브리오 같은 느낌이 들어서 재밌었다고 해야 할까, 일찌감치 마을에 도착해 쉬면서 오세브리오를 구경하는 것이 오늘의 목표였다.

    하지만 오늘은 안나와 그리고 다른 친구들과 함께 걷다 보니, 하루의 시간을 꽉 채워 걸었다. 그들은 나와 다르게, 걷는 시간에 집중하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말이다. 걷는 중간중간 식당에 들러 밥도 먹고, 카페에 들러 차도 한잔 마시고, 속도를 높여 걷기보단, 노래를 부르며 천천히 걷기를 선호했다. 그 바람에 해가 다 지고 나서야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도착해보니 숙소와 연결되어 있는 식당만이 문을 열어, 뒤늦은 우리에게 순례자 메뉴를 팔고 있었을 뿐, 다른 가게들은 전부 문을 닫은 상황이라 오세브리오를 구경할 수는 없었다.


걷다가 만난 당나귀, 나도 당나귀와 함께 걸어보고 싶다.


    세상에는 선택과, 그 선택으로 인해 희생된 기회비용이 있음을 잘 안다. 오늘의 선택은 남들과 보조를 맞춰 걷는 것이었고, 그에 따라 ‘일찍 도착해서 쉬고, 마을 구경하기'가 희생된 것이다. 일종의 일장일단이라 생각해도 좋겠다. 빨리 걷는 건 일찍 도착하게 길게 쉬고 마을을 구경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걷기'를 향유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고, 천천히 걷는 건 그와 반대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 이렇게나 천천히 걸어 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아직은 ‘천천히 걷기'의 장점보단, 마을을 구경하지 못한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그러나 또 반대로 생각해보면 언제 이렇게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나 싶은 생각도 든다. 그래, 언제 그들에게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라고 물었을 수 있을까.


    돌이켜보면 그래도 꽤 즐거운 시간들이었다.


    숙소에 도착해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우연히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피스테라의 사진을 봤다. 사진 속 피스테라가 너무 아름다워서 아마 산티아고에 도착하고 나서도 더 걸어서 피스테라까지 가보게 될 것 같다. 물론 이 까미노의 일정 이후에 미국에 가보려는 일정이 남아있지만, 요즘 코로나로 인해 한국이 난리니까, 비교적 안전한 이곳에서 시간을 더 보내는 것도 좋겠다.

    참 희한한 일이다. 보통 집을 떠나 타지에 나와 있는 나는 걱정을 받는 쪽이었다. 다들 내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나의 안부를 물어오곤 했는데, 이제는 코로나 때문에 내가 한국에 있는 나의 가족들과 친구들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다. 부디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코로나로부터 안전하기를 바란다.


코리안 하트를 날리는 우리


    모처럼 숙소에 도착해서 저녁을 먹으며 와인을 많이 마셨다. 이상태로 글을 더 짜내다가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풀어낼 것만 같다. 아니 어쩌면 이미 궤변을 쏟아 낸 것일 수도 있겠다. 충분히 좋았던 하루를 돌아보며 ‘오세브리오를 구경하지 못해서 아쉬워'라고 칭얼댔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제 그만


    마침 숙소에 와이파이도 제대로 동작하지 않아서 욱희의 핫스팟을 빌려 쓰고 있는 실정이니, 오늘은 이만 줄이고 일찍 자야겠다. 따뜻한 침대가 기다리고 있으니, 벌써부터 잠자리가 설레기까지 하네.


    이제 정말 며칠 남지 않았다. 남은 며칠도 오늘처럼, 그리고 다른 날들처럼 행복하기를 바란다.


    행복하자 성호야.

    진짜 진심으로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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