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순례길, 까미노 데 산티아고 / Day 24 / 718.2km
여유를 표방한 걸음걸이를 시작한 이후로, 모처럼 30km를 넘게 걸었다.
폰페라다에서부터 Villa Franca del Bierzo(비야프랑카델비에르소)까지.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왔다. 우비를 굳이 입을 정도로 비가 내렸던 것은 아니지만, 기분을 가라앉게 만들기에는 충분한 정도였다. 아마 어쩌면 비 때문이 아니라 모처럼만에 30km를 걸어야 하는 날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비가 왔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오랜만에 속도를 높여 걸어야 하는 발걸음이 낯설어서였을까, 머물던 폰페라다라를 벗어나지 못한 채 마을 언저리에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비가 조금 그칠 때까지, 그리고 카페인을 통해서 가라앉았던 기분이 다시 올라올 때까지 기다렸다. 연극을 공부하면서 배워뒀던 몸 푸는 방법도 오늘의 걸음을 준비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어제 산길을 내려오면서 무리했는지 다리도 다시 아프고, 새로운 물집도 생기는 바람에 몸이 많이 무거워졌다고 느끼고 있던 찰나였는데, 여유로운 아침의 시간이, 카페인이, 그리고 스트레칭이 다시 활기를 불러왔다.
이전까진 마을에 도착해서 쉬는 시간을 가졌다면, 요새는 걷는 와중에 쉬는 시간들을 잘 챙기고 있다. 함께 걷고 있는 종우와 욱희, 그리고 길 위에서 만나는 외국인 친구들과 맘에 드는 장소에서 점심을 먹기도 하고, 길을 걷다가 널찍한 바위가 있으면 잠시 다 같이 앉아 쉬면서 수다도 떨면서 걷고 있다. 오늘은 걷던 도중에 지나던 마을 까까벨로스에서 그 유명한 스페인식 문어요리, 뽈뽀도 먹을 수 있었다. 맥주 한 잔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맥주와 뽈뽀가 불러온 여유로운 마음 덕분이었을까, 참 웃음이 많이 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마 이 때문에 정서적 결핍이 없어지고, 그 때문에 일기에 쓸 말이 없어진 것 같지만, 하루하루를 제대로 향유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마음이 들어 만족스럽다.
호랑이 장가가는 날처럼 비가 내렸던 덕분에 모처럼 무지개도 봤다. 한국에서도 참 많이 뜨는 무지개이고, 많이 봐온 무지개인데, 왜 이렇게 오늘의 무지개는 낯설었을까. 외국에서 본 무지개니까 그렇다고 하기엔, 다낭에서도 무지개를 정말 많이 봤는데, 오늘의 무지개는 참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마치, 착한 사람들 눈에만 보인다고 이야기하는 무언가처럼, 무지개라는 것은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만 보이는 것이 아닐까 하는 동화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결국엔 잠깐은 하늘을 올려다볼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무지개를 볼 수 있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만약 이 말이 맞다면, 길을 걸으며 정말로 무언가를 버리고 있긴 한가보다.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 이런 무지개까지 볼 수 있었으니까.
오늘의 목적지였던 비야프랑카델비에르소는 한국에서 유행했던 예능 프로그램 <스페인 하숙>의 촬영지로 등장했던 곳이다. 나는 그 프로그램을 본 적이 없어서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아마 함께 걷고 있는 욱희와 종우에게는 익숙한 프로그램이었나 보다. 그들은 오늘의 까미노를 준비하면서 그 프로그램을 한 번쯤은 봤었던 것일 테다. 그런 욱희와 종우가 안내하는 대로 따라 <스페인 하숙>에서 알베르게로 등장했던 촬영지를 다녀오기도 했다. 비록 문은 닫았기에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낼 순 없었지만, 각자 차승원과 유해진, 그리고 배정남이 되어, 마치 알베르게의 주인이 된 것처럼 사진도 한 장 남겼다.
내가 이 까미노 위에 있는 어떤 알베르게의 주인이라면 어떨까?
글쎄, 막상 알베르게를 운영한다고 생각하니, 현실적인 부분들이 떠올라 즐거운 상상이 제한되긴 하지만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굉장히 즐거운 나날들을 보낼 것만 같다. 길 위를 걷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 내가 걸었던 이야기들을 나누고. 그렇게 이야기가 가득한 알베르게라면...... 그리고 그 알베르게의 주인이라면...... 하루하루가 행복할 것만 같다. 재밌는 에피소드를 들려주는 사람에게 무료로 머물 수 있는 특권 같은 걸 주면 어떨까? 아, 그러면 누구나 다 무료로 머물게 되면서 알베르게가 금방 망하려나......
솔직한 마음으로 나는 <스페인 하숙>이라는 프로그램을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까미노가 미디어에 노출되면서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질투가 났기 때문이다. 나만 알고 싶은 가수가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면, 그 마음이 차츰 사그라드는 그런 마음이랄까? 그런 마음 때문에 <스페인 하숙>이라던가 <같이 걸을까>라는 프로그램처럼, 까미노가 한국의 예능프로그램에 노출되는 일을 반기지 않았다. 그래서 종우와 욱희가 우리가 머물기로 한 숙소의 체크인을 뒤로한 채 촬영지로 달려가는 모습이 처음엔 못마땅했다. 하지만 내가 크로아티아에서 <왕좌의 게임> 촬영지에 다녀오고 싶어서 한두 시간을 걸어갔던 모습이 떠오르며 괜스레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 각자마다 취향은 있는 거니까.
덕분에 아주 멋진 사진도 건질 수 있었고, 오늘 마을 광장에서 축제가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마침 오늘 저녁을 어디서 먹을까 고민했었는데, 카니발을 구경하며 먹으면 되겠다는 근사한 계획도 생겼다. 그렇게 숙소에 짐을 풀고, 마을 광장으로 나가니 축제 준비가 한창이었다. 까미노를 걸으면서 대도시 말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보는 건 또 처음이다. 마을의 규모도 작던데, 다들 어디서 온 것인지 마을 광장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피자 한 조각을 주문하는데도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서 주문을 해야 할 정도로 정말 사람이 많았다. 그 많은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낸 열기를 바싹 느낄 수 있었던 하루였다. 비록 우리 순례자들이 카니발의 주인공은 아니었지만(꼭 주인공일 필요도 없겠지만), 마을 사람들과, 그리고 같은 알베르게에 머물고 있는 친구들과 저녁식사를 함께하며, 춤도 추고 함께 흥을 나누며 아주 즐거운 추억을 만들 수 있었다.
동행이 생기는 것을 억지로 거부하고, 스스로를 고독으로 밀어 넣으며 생각이란 걸 할 수 있게끔 강요하던 나의 지난날들이 자꾸만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세상엔 참 많은,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을 통해 많이 배울 수 있는데, 나는 왜 그들을 만나는 일을 그렇게나 거부했을까.
심지어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나를 돌아보는 경우도 참 많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나는 그들을 거부했을까. 늦었겠지만, 문득 길 위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함께하는 욱희와 종우는 물론이고, 그리고 매일 앞서 나가는 바람에 숙소에서 말고는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은 영준이 형님, 그리고 함께했던 지영이 형님, 형석이, 성준이, 숙인이, 정연이, 길 위에서 종종 만나게 되는 성당 선생님들, 그리고 길 위에 함께 올라있는 외국인 순례자들까지. 모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은 마음이다.
나를 발견할 수 있게 해 줘서 참 고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