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까미노 데 산티아고 / Day 23 / 687.4km
확실히 새벽이 주는 에너지가 있다.
오늘은 하루를 일찍 시작했다. 아침 여섯 시부터 숙소를 나서, 철의 십자가가 있는 언덕 위에 올라 일출을 보는 것이 목표였다. 아침 일찍, 누군가는 아직 꿈나라에 있는 그 시간에 우리는 길을 나섰다. 길이 어두워서 헤드라이트와 휴대폰 플래시로 길을 비추며 걸어야 했지만, 한걸음 한걸음이 가벼웠다. 약간은 춥게 느껴지는 새벽 공기에 폐에 차오르며 몸을 가볍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새벽 공기는 우리가 평소에 마시는 공기보다 훨씬 가벼운지도 모르겠다.
하늘엔 수 없이 많은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어젯밤에도 숙소 앞에 별들이 많이 떴길래, 사람들을 불러 모아 사진을 찍었었는데, 그 별들이 아직 떠오르지 않은 태양빛을 피해, 마지막 기염을 토해내고 있었다. 여태 동안 여행을 하면서 봤던 밤하늘 중에 이렇게까지 많은 별을 품고 있는 날은 없었다.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별들, 늘 그 자리에 존재했지만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반짝이는 별들을 보고 있자니, 정말 행복이란 건 내 주위에 늘 존재하는데, 보지 않는 건, 보지 못하는 건 결국 내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런 별들의 품 속을 오래도록 걸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철의 십자가가 있는 언덕에 서서, 태양빛에 별들이 지워지는 순간은 목격하지 못하였다. 시간 계산을 잘못한 탓에, 우리의 보폭을 과대평가한 탓에, 철의 십자가에 오르기 전에 하늘이 이미 붉어 올랐기 때문이다. 그 때문일까, 철의 십자가가 생각보다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본인의 땅에서 가지고 온 돌들을 이곳에 놓는다는 둥, 미련을 놓고 온다는 둥,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곳이라 했지만, 그런 이야기들의 반짝임에 비해, 철의 십자가의 모습은 초라했다. 아마도, 부정적인 이야기들이 모여 철의 십자가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슬픔으로 빛나는 별은 없으니까.
그래도 오늘의 첫 목표지였으니까 짐을 내려놓고 미리 도착해 있던 사람들, 우리들, 그리고 우리들 뒤에 뒤따라 오는 사람들과 사진을 남기고, 간단히 아침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십자가를 등지고 내려가려는데, 그제야 괜히 느낌이 묘했다. 일종의 목적지로서 존재하는 장소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철의 십자가가 품고 있는 슬픔의 무게 때문일까, 막상 통과하고 나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나도 무언가를 놓고 왔어야 했나 싶은 후회. 그냥 통과해버리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철의 십자가로 돌아가 예쁜 돌멩이에 ‘Don’t Look Back’을 적어 내려놓았다.
‘Don’t Look Back’ 이건 나의 미련은 아니다. 나의 슬픔도 아니고, 나의 부정적인 스토리도 아니다. 그저 나의 다짐일 뿐이다. 그래, 무언가를 내려놓진 못했다. 하지만, 철의 십자가를 통과하며 나도 모르는 새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치고, 그게 뭐가 됐든 돌아보지 않으리라고. 나는 그렇게 다짐했다.
첫 번째 목적지가 끝나고 나니 알베르게에서 길을 처음 나서는 것처럼 새롭게 시작하는 느낌이 들었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아니, 생장에서부터 여태 함께 있는 욱희와, 카스트로헤리스에서 잠깐 인연을 쌓은 종우가 오늘의 동행이 되어 주었는데, 그들과 함께 걸으니 되려 힘이 났다. 가는 내내 수다도 떨고, 커피가 마시고 싶으면 눈에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 커피도 한 잔 마시며 쉬엄쉬엄 하루를 음미했다. 결국 총 12시간이나 걸려버렸지만 걷는 내내 즐거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소로 돌아와 다이어리를 쓸 때면 즐겁지 않다. 솔직한 심정을 고백하자면, 사실 요새 들어 다이어리를 계속해서 쓰는 일이 버겁기 때문이다. 걸으며 들었던 생각들을 정리해서 적고 싶은데, 다이어리에 행동이 아닌 생각들을 담고 싶은데, 막상 걸으면서 하는 생각들이 다이어리에 쓰일 만큼 무겁지 않을뿐더러, 많지도 않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모르겠다.
혹자들은 결핍이 글을 쓰는 원동력이라고 하던데, 내게 그 결핍, 그것이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내가 비결핍의 상태이기 때문에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써내야 할지 모르겠는 건 아닐까.
그렇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 내 친구 ‘한성호’와 대화를 하는 시간보다, 함께 걷고 있는 욱희, 종우 그리고 까미노에서 만난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더 많다. 누구와 무슨 대화를 했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시답잖은 대화들이지만, 덕분에 고통스러운 생각의 늪에서 빠져나오기도 하고, 과거를 돌이키며 현재의 나를 갉아먹지 않을 수 있게, 자연스럽게 ‘Don’t Look Back’도 실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 행복하다는 느낌을 다시금 자주 받고 있다.
길을 걷다 만나게 된 가톨릭 신자셨던 어르신께서, 까미노 길에서 한 신부님이 해주신 말을 전해 주신 게 생각난다.
‘걷고 나면, 그리고 산티아고에 도착하고 보면 선물을 한 가지씩 받으실 거예요’
글쎄, 도대체 내게 주어질 선물이 무엇인지 감이 잡히질 않지만, 이 비결핍의 상태가 선물이라면 선물일 수 있겠다.
이 행복감이 참 만족스럽다.
열흘도 남지 않았다는 게 문득 사무치게 아쉽다.
진짜 산티아고를 넘어 피스테라까지 걸어야 할 건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