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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성호 Apr 05. 2022

무엇을 놓고 와야 할까

스페인 순례길, 까미노 데 산티아고 / Day 22 / 647.2km

오늘의 루트


    너무 무거워서 산을 넘지 못하고 비를 뿌려대는 먹구름처럼, 높은 산을 앞두고 많은 순례자들이 한 곳에, 이곳 라바날 델 까미노에 모여있다. 처음으로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한 알베르게에 머물러 본다. 이 많은 사람들은 여태 다들 어디에 있던 사람들일까? 오늘의 길은 어땠는지, 내일은 어디까지 갈 예정인지, 그리고 네가 까미노를 걷는 이유는 무엇인지 서로 묻고 답하며 하루 종일 알베르게가 시끌벅적하다.

    레온 이후로 여유가 많이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여유를 챙기는 방법을 알았다는 표현이 더 맞는지도 모르겠다. 여러 날들을 반복하면서 급하게 걷지 않더라도 결국엔 목적지에 닿는다는 걸, 그리고 그래 봐야 한 두 시간 차이라는 걸 깨달아서 이젠 걸음이 가볍고 즐겁다. 희한하게 발도 더 이상 아프지 않다. 참 다행이다. 걸레짝이 되어버린 발로 남은 날들을 어떻게 헤쳐나가나 싶었는데, 하나도 아프지 않다. 아직까지 물집은 가지고 있지만 그렇게 아픈 물집이 아니라 참 다행이다.


여유로운 우리


    아스트로가에서 라바날 델 까미노로 이동했다. 내일 넘게 될 철의 십자가가 있는 산 바로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말로만 듣던 철의 십자가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그리고 다들 그곳에다가 마음의 짐이 되는 ‘무언가’를 놓고 온다던데,

    글쎄 나는 무엇을 놓을 수 있을까.

    무엇을 놓고 와야 할까.



욱희와 나


    걸으며 무언가 생각거리가 생기고, 고민이 생기고, 또 고민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자꾸만 스스로를 생각의 늪으로 밀어 넣곤 한다. 하지만 결국엔 오늘의 숙소는 어떨까? 따뜻하긴 할까? 내일은 몇 km를 걸어야 하는 걸까? 몇 km가 남았지? 하는 생각이 들면 늪을 헤치고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된다.

    나는 사실 그 느낌이 싫다. 생각에 깊이 잠겨 걷기를 원한다. 걸으면서 생각하지 않으면,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이 혼자만의 시간 동안 그리고 이 고독과 힘듦의 시간 동안 고민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솔직히 가끔은 억지로 무언가라도 생각하게끔 스스로 압박감을 줄 때도 있다.

    매일매일 글을 짜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그럴 수도 있겠다. 매 글마다, 나의 기록마다 어떤 생각을 담고 싶은데, 생각하지 않으면, 오늘의 소재가 없으면 글을 쓰기 힘드니까 말이다. 그런데 문득 이 길을 걸으며 생각하는 것들이 다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그 수많은 생각들이 정말 의미가 있을까?

    걸으면서 아무런 생각이 없다고 한들, 내가 변하는 게 없을까? 사실 그렇지 않다. 솔직히 툭 까놓고, 못해도 체력은 얻을 것이다. 그러니 분명 얻는 게 있는 길이다. 조금은 생각을 해야 한다는 이 압박으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겠다. 더 가벼워야 할 필요가 있겠다. 아마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 내가 까미노를 걸으면서 이런 걸 얻었던 것이구나’하며 전부다 자연스럽게 깨닫게 될 테니, 지금은 그냥 이 순간을 즐기는데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그래, 어쩌면 내가 철의 십자가에 놓고 올 것은 이 수 없이 많은 생각들이 아닐까.


라바날 델 까미노의 숙소에서, 우리

    내일은 보다 일찍 하루를 시작할 예정이다. 철의 십자가에 올라 선라이즈를 감상할 예정이다.

    아마 춥겠지? 아니 그전에, 내가 잘 일어나긴 하려나? 일찍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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