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순례길, 까미노 데 산티아고 / Day 20 / 592.9km
어제의 다짐에 따라, 오늘은 조금 천천히 적당한 거리를 걸었다.
아침부터 뭉그적 뭉그적, 느릿느릿 출발해서 천천히 하루를 음미했다. 레온을 조금 더 구경한다는 마음으로, 레온 시내를 조금 더 둘러보다가 나오며, 모든 장비를 갖춘 우리의 모습이 문득 멋져 보여서 성당 앞에서 기념사진도 찍었다. 생각해보니 우리가 함께 있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은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이렇게 장비를 갖춘 채 사진을 찍으니 괜히 감회가 남달랐다. 그래, 우리는 순례자다.
오늘은 레온에서부터 25km를 걸어서 산 마틴 델 까미노로 왔다. 누군가는 20km도 많은 거 아니냐고 묻는 사람도 있겠지만, 자부심 섞인 허세를 부리자면, 나는 이제 20km대 거리는 짧게 느껴진다. 그런 의미로 오늘의 걸음은 참 여유로웠다. 다른 날들처럼 30km 이상을 걷는 챌린지를 성공적으로 마치는 성취감과는 다른 의미로 기분이 참 좋았다. 정말 걷고 싶은 대로 걸어서가 아닐까.
다시 일상이다. 밖에서 보기엔 분명 이 또한 여행이겠지만,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마치 휴가를 마치고 오랜만에 회사로 출근하는 직장인의 마음 같았달까.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아침에 일어나 간단히 아침을 먹고 오늘의 목적지를 향해 또다시, 지난날들과 똑같이 걷는다는 게 참 일상스럽다. 글쎄, 걷는 일이 일상이라니. 걷는 걸 그렇게나 좋아하는 내게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은 축복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좋아하는 일상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분명 다시 한번 올 것 같은 까미노이지만, 이번이 마지막인 것처럼 이 축복을 충분히 음미해야겠다는 의무감이 든다. 아, 의무감에 목매달면 또 다른 것들을 놓치게 되지 않을까? 아무튼.
이제 함께하던 동행들과 하나 둘 흩어지고 있다. 지영이 형님의 어제 하루 일찍 출발하셨고, 레온에서 잠깐 만난 수아 씨는 뒤따라오고 있는 남자 친구를 마저 기다리겠다고 우리와 함께 출발하지 않았다. 그렇게 출발선에는 욱희와 나, 형석이 이렇게 셋이서 섰는데, 같은 골인지점을 통과한 것은 욱희와 나뿐이었다. 형석이는 본인만의 긴 다리를 이용해, 우리를 앞지르더니 우리보다 조금 더 멀리 있는 알베르게에 묵고 있다고 했다.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행복했다. 그리고 지금도 행복하다. 그들 덕분에 혼자 여행을 할 때보다 오히려 더 잘 챙겨 먹을 수 있었고, 심심할 새 없이 수다를 떨어댔으니 행복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그렇다고 늘 함께였던 것은 아니다. 나는 그 속에서 나름대로 혼자만의 시간을 챙기려 노력했고, 그들 또한 그랬으며, 그런 서로를 우리는 존중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나는 그걸로는 부족하다고 느끼기도 했다. 더 오롯이, 그러니까 정말 혼자가 되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느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니까. 함께 걷다 보면, 아무리 서로의 시간을 존중 한다고 하더라도, 나도 모르게 눈치를 보는 일들이 있었다. 그러니 그것은 분명히 내가 바라는 ‘혼자'와는 다른 느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굳이 내가 피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까미노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는 어렵다. 함께하던 동행들을 만난 것도 마찬가지인데, 걷다 보면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나기 때문이다. 길을 걸으며 사람을 만나 ‘Buen Camino', ‘See you again’이라고 말하는 횟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만큼 길 위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대체로 한 번씩 본 얼굴들이 많지만, 이제 대도시들을 몇 개 지나와서 그런지 계속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욱희와 내가 산 마틴 델 까미노의 마을 초입에 있는 알베르게로 들어가려고 할 때, 이미 도착해서 알베르게 앞 정원에서 커피를 마시며 여유를 즐기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영준이 형을 처음 또 새롭게 만났다. 그는 나만큼 머리가 길어서 ‘아 이 사람도 세계여행을 했던 사람이구나'하며 생각하게 만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미 유럽에서 오랜 시간 생황을 했던 사람이었는데, 지내오면서 생긴 매너리즘을 타파하고자 이 까미노를 걷고 있다고 했다.
영준이 형뿐만 아니라, 종우라는 친구와, 조이라는 친구도 함께 알베르게에 머무는 한국인이었다. (역시나 이 까미노에는 한국인이 참 많은 것 같다.) 그런 그들과 함께 저녁을 나눠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글쎄, 이제부터 이들과 보폭을 맞춰 걷게 될지는 아직까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또다시 새로운 인연을 만나고 보니, 아사람들을 만나는 것 또한 여행의 큰 행운이니,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집중하라는 까미노의 가르침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래, 어쩌면 나는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며,
계속해서 혼자가 되고자 부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인연이 생기면 생기는대로, 그렇게 새로운 인연을 떠나보내게 되면 떠나보내는 대로,
그 속에서도 분명 깨달음이 있겠다.
문득 서른이라는 나이에 대해서 생각한다.
2020년이 새롭게 밝고, 설날이 끝난 지도 한참 됐지만, 이제야 진짜 서른을 앞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마 이 세계여행이 끝날 때,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그때 비로소 서른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 순간이 참 아름다운 20대의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름대로 고군분투하며, 찬란하게 살았던 20대, 그 20대를 정말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있구나.
한국으로 돌아가면 스페인어를 꼭 배워야겠다. 알고 보니 중국어 다음으로 많이 쓰이는 언어가 영어가 아니라 스페인어라고 했다. 그 살에 정말 놀라웠다. 이 정도면 충분히 배울만 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그리고 언젠가 마음속으로 그리고 있는 새로운 여행, ‘남미 여행'을 위해 스페인어를 배워두는 게 참 도움이 될 것 같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Hola’, ‘Gracias’, ‘Buen Camino’를 반복해서 말하고 있지만 다른 문장들도 뱉고 읽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그래, 그렇게 스페인어를 배워 남미 여행을 하는데에 도움을 주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