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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성호 Mar 24. 2022

다시,

스페인 순례길, 까미노 데 산티아고 / Day 19 / 564km

    결국 레온에서 하루 멈췄다가 간다.


    아침에 일어나 지금까지 함께하던 지영이 형님과 마지막 아침 식사를 했다. 그리고는 형님을 배웅하며, 함께 훗날을 기약했다. 길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는 것을 반복했는데, 이번엔 조금 느낌이 다르다. 글쎄, 이제 이 까미노 위에선 지영이 형을 다시 볼 날이 없게 됨을 알아서였을까, 언제 다시 보게 될지 모르겠으니, 괜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게 느낌이 이상했다.


떠나는 그의 뒷모습...


    이른 아침 형님을 떠나보냈기에, 결국 다시 침대로 돌아가 누웠다. 이러한 행동은 이미 레온에서 하루 쉬겠다는 다짐이 들어있는 몸짓이겠지만,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계속해서 고민을 했다. 그리고는 결국, 다시 일어나 이미 출발하기엔 늦은 시간을 휴대폰을 통해 확인하며 ‘아 괜히 하루 더 쉬었나?’ 같은 후회를 낳았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하루 쉬길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하루 안 걷는다고 벌써 발고 다 나은 것만 같고, 모처럼 누리지 못했던 여유를 실컷 부렸으니 말이다. 정말 내 안의 배터리가 가득 충전된 느낌이다. 내일의 코스가 40km일지라도, 거뜬히 이겨 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사실 별다른 걸 한 것은 아니다. 어제 가봤던 곳(발이 아프더라도 발발 거리며 돌아다니긴 했으니까)을 다시 가보는 것이 전부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햇살도 정말 따뜻해 좋았고, 무엇보다 ‘얼마나 걸었지?’ 같은 계산적인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리고 ‘더 가야 해’하며 압박감을 느끼지 않았던 여유로움이 좋았다. 입장료 때문에 들어가 볼까 말까 고민하던 레온 대성당도 욱희, 형석이와 함께 들어가 구경도 하고, 여러 카페와 바를 옮겨 다니며 커피도 마시고 맥주도 마셨다.


레온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아, 물론 내 사랑 맥도날드에 가는 것도 빠질 순 없다.


    글쎄, 왜 이렇게 맥도날드를 좋아하게 된 것인지 모르겠는데, 가끔 맥도날드가 당기는 날이 있다. 그런데, 여태껏 스페인의 소도시들 위주로 다니다 보니 맥도날드를 찾아볼 수가 없었어서, 그 마음이 더 가중되었던 것이다. 이런 맥도날드를 향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욱희와 형석이를 설득해 맥도날드에도 함께 다녀오게 되었다.

    맥도날드에는 레온이 키워낸 청소년들이 많이 보였다. 글쎄, 나는 학창 시절에 친구들과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먹어 본 적이 없었는데, 어쩌면 그들에겐 패스트푸드점이 우리네의 분식집 같은 느낌이 아니었을까.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햄버거를 먹는 모습을 보는데, 괜히 나의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야자가 시작하기 전, 석식을 까먹고 신청하지 못한 친구들과 난생처음 먹어본 순댓국 맛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때 이후로 순댓국을 좋아하는 사람이 된 것 같은데, 그 친구들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그들도 나와 같은 추억을 갖고 있을까?


레온 대성당의 웅장한 모습


    어느 순간부터 기분이 좋으면, 그리고 기분을 좋게 만들고 싶으면 하는 일들이 생겼다. 맥도날드에서 빅맥세트에 치즈버거를 추가해서 먹는 일이 그중에 하나이고, 시장의 과일가게에서 상큼한 과일을 사 먹는 것 또한 그런 일중에 하나다. 아마 한국으로 돌아가서도 이 습관은 버리지 못할 것 같다.

    그저 어제처럼 도시를 방황하고, 어제처럼 따뜻한 햇살을 받았으며, 어제처럼 햇살이 비치는 야외 테라스 자리에 앉아 맥주를 마셨을 뿐인데, 어제보다 오늘이 문득 더 행복하다. 물론, 어제도 행복한 순간이었겠지만은, 그걸 향유할만한 마음의 여유를 가진 나는 어제 그곳에 없었다.

    분명 까미노를 걸으며 하루하루를 기록하기 시작했을 때, 그러니까 까미노 초반에는 모든 순간이 참 행복하다고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다이어리에 ‘행복'이라는 단어가 참 많이 등장을 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 기분을 잊고 지냈나 보다. 행복하다는 말을 거의 달고 살았던 것 같은데, 가야 한다는 압박감에, 그리고 몸과 마음에 자꾸만 쌓여가는 피로감에 요즘엔 힘들다는 말을 달고 살고 있다. 참 감사하고 소중한 시간이며,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행복한 시간들일 텐데 꽤나 많은 시간을 ‘향유'가 아닌 ‘극복'만을 생각하며 보낸 것 같아 아쉽다. 오늘을 통해 다시 그 기분을 찾았으니, 남은 까미노는 보다 음미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고작 하루 쉬었을 뿐인데, 발도 많이 괜찮아졌다. 스페인산 메디폼도 새로 잔뜩 구매했으니 걱정 없다. 하지만 발의 건강도 건강이고, 까미노를 조금 음미하자는 차원에서 앞으로는 웬만하면 긴 거리를 걷는 일을 피하려 한다. 오픈한 알베르게를 찾아 의도치 않게 더 걷는 경우도 분명 있겠지만, 좀 더 여유를 찾기 위한 결정이다. 그래, 나는 돈은 없지만 시간은 많은 여행자이니까, 가난하지만 부유한 여행자이니까.


    그런 의미로 내일은 25km.

    또다시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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