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_Avignon, France

두려움과 설렘에 대하여

by 한성호

새벽 경유도 아무렇지 않게 하고, 해가 떨어지고 숙소를 찾아가는 것도 아무렇지 않다. 이제는 겁나지 않는다.


E50E0FA5-06EB-4589-99E1-89AC08711427.jpg 리옹의 작은 공원


중국에서는 워낙에 땅덩이도 넓은 데다가, 머물 수 있는 시간도 많이 없었기 때문에 장거리 이동이 많았다. 비행기를 타지 않고 육로로만 이동을 하는 것이 이번 여행의 목표니까, 하루 종일 기차나 버스에 앉아 있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유럽은 반대로 비교적 좁은 땅에 여러 나라가 옹기종기 모여있고, 머물 수 있는 시간도 비교적 여유롭다. 그러니 장거리 이동을 할 필요가 없었다. 다음에 가보고 싶은 나라, 다음에 가보고 싶은 도시가 바로 옆에 붙어있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오늘 오랜만에 무려 22시간짜리 이동을 했다. 물론 그중에 10시간은 경유지에서 대기하는 시간이긴 했지만. 장거리 여행이 새삼 낯설다.


소도시를 둘러보려고 하다 보니 환승이 잦다. 게다가 최대한 저렴하게 이동을 하려니까 몸이 불편하다. 나의 다음 목적지는 아비뇽이었다. 그리고 아비뇽까지 향하는 도중, 첫 번째로 경유했던 곳은 디종이다. 디종에서 4시간을 경유했다. 사실 4시간 경유가 뭐가 그렇게 어렵겠냐만은 새벽 3시에 도착해서 아침 7시까지 기다려야 하는 경유는 경우가 다르다. 아무래도 나 같은 사람이 종종 있을 테니까, 그리고 기차역 근처니까, 새벽에 문을 연 곳이 한 곳 정도는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역시나 기대는 기대일 뿐이었고, 그나마 믿고 있었던 기차역도 막차가 지나가고 나자 사람들을 바깥으로 내쫓았다. 어디든 추위를 피할 곳이 필요했다. 기차역과 붙어 있는 외부 계단이 그나마 괜찮아 보였는데, 바람을 좀 막을 수 있겠다 싶은 계단엔 이미 노숙자분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기차역에 딸린 주차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주차된 차들을 바람막이 삼아 차 사이에 앉아 있었다. 처음엔 내 처지가 노숙자보다 못한 것 같아서 가슴이 시렸지만, 인간은 진짜 적응의 동물인가 보다. 시간이 지나니까 차에 기대 졸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심지어 그렇게 자고 일어나니까 배가 고파져서 싸온 식빵에 잼까지 발라먹었다. 정말 나도 참 대단하다.


IMG_7534.jpg 비어있는 디종 기차역


두 번째 경유는 리옹이었다. 리옹에서는 6시간을 기다렸다가 다음 차를 타야 했다. 리옹 경유는 그래도 낮시간이라 가방을 메고서라도 리옹을 좀 둘러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검색을 해봐도 딱히 흥미로운 곳을 찾을 수 없었다. 가보기에 괜찮겠다 싶은 곳은 또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짧은 이동을 해야 했는데, 그런 번거로움은 조금 지양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엔 맥도널드에 주야장천 앉아 있었다. 역시나 이곳 맥도널드에도 노숙자가 있었다. 이 정도면 나와 노숙자가 뭐가 그렇게나 다른가 싶은 생각이 든다. 아무튼 노숙자와 나, 누가 더 오랫동안 눈치 싸움에서 승리하여 오래 앉아있는지 경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야 당연히 그를 이길 수는 없었지만, 나도 꽤나 긴 시간 동안 와이파이의 혜택을 받으며 맥도널드에 앉아 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서, 다음 여행을 위해 해야 할 일들도 알아보고 하나씩 하나씩 준비를 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제는 아비뇽에 도착해야 맞는 타이밍이다. 하지만 마지막 도착지는 사실 아비뇽이 아니라 Le pontet이라는 마을이었다. 이 마을에서 아비뇽까지는 걸어서 1시간 남짓 떨어져 있었다. 해는 이미 진지 오래지만, 이제는 버스도 없고 걷는 수 밖에는 없었다. 그렇게 지난밤 9시에 시작한 일정이 다음날 저녁 8시가 넘어서야 마무리되었다. 나는 마침내 아비뇽에 도착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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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옹의 풍경


문득 이번 장거리 이동을 돌이켜보니 참 많이 컸다는 생각이 든다. 겁을 덜 먹는 게 여행력이 늘었다는 증거라면, 그래, 여행력이 늘긴 늘었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나의 첫 유럽은 겁으로 가득했다. 런던을 보겠다며 무박 2일 일정으로 파리에서 다짜고짜 유로스타를 타고 떠났다가 해가 떨어지고 나니 잔뜩 겁에 둘러싸여서 울면서 나 잘 곳 좀 알아봐 달라며 대사관에 전화를 했었는데, 대사관에서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자전거에서 내리면 괴한이 날 덮칠까 봐 쉬지 않고 달렸었는데, 그때에 비하면 정말 많이 성장했다.

버스가 휴게소에 멈춰 섰을 때, 예전 이탈리아를 여행할 때 장거리 버스를 탔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이번처럼 버스가 휴게소에 들렀다가 출발을 했었다. 그땐, 이때 아니면 언제 유럽의 휴게소에 와보겠냐며 내려서 구경은하고 싶은데, 버스는 나를 두고 떠날 것만 같아서 그게 그렇게나 무서웠다. 그래서 이 버스가 다시 몇 시에 출발하는지 기사님께 몇 번씩이나 여쭙고, 날 까먹고 가지 말라고 기사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면서 내 얼굴을 각인시키고, 화장실도 따라가고, 먹을 것도 따라서 사고, 기사님이 이동한다 싶으면 이동하면서 그렇게 휴게소를 구경했었는데 말이다.

물론 지금도 조심해서 나쁠 거야 없지만, 이젠 그때만큼 겁먹지 않는다. 글쎄, 이제는 유럽의 휴게소나 한국의 휴게소나 거기서 거기구나 하는 걸 깨달아버려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잠시 버스에서 내려 바람이나 좀 쐬는 게 전부니까, 굳이 휴게소를 구경하겠다고 버스에서 내릴 필요가 없으니까 그럴지도 모른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뭐 그렇게나 무서운 일이라고 그때는 그렇게 호들갑을 떨었는지 모르겠다. 그때를 생각하면 참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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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아비뇽의 한산한 거리


그러다 보니 문득 아쉽다. 두려움과 설렘, 두 단어의 뜻은 다르지만 어느 정도의 두려움이 있어야 떨림이 있고, 또 그런 떨림이 곧 설렘이 되는 것 같아서 말이다. 그리고 그런 설렘이 지금 내가 이렇게 이야기를 쓰는 것처럼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 법일 텐데. 여행력이 늘었다는 사실은 꽤나 반갑지만, 설렘은 점점 잃어가는 것 같아서, 문득 아쉬움이 드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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