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성민 Apr 07. 2024

우리 애가 드디어 성공한 줄 알았는데

집안을 일으킬 증손자

  "할아버지 장례식 때 네가 사관학교 정복을 입고 왔잖아. 그때 동네 사람들은 네가 성공했다고 난리도 아니었어."

  저녁 먹다가 어머니가 말했다. 내가 치료를 받느라 실직을 하고 나서 오랜만에 어머니와 함께 하는 자리인데 안타까움인지 미안함인지 어떤 감정인지 모를 묘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마치 영웅담을 이야기하듯 했다.

  "그랬어?"

  잠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말했다.




  나는 밤골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조선마지막 전라감사의 증손자이다.

  태어난 직후에는 밤골마을에 살다가, 서울 노량진, 영등포 등에서도 살았고 광주에서도 살았다. 아버지가 중국집에 취업하거나 직접 차리거나 해서 나와 살았던 것이다. 실패한 양반집안의 아들이 산업화되는 우리나라에서 살아남아보고자 나름대로 노력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다니던 식당을 그만두거나 직접 차린 중국집이 망하면 나와 어머니만 시골로 돌아오기도 하고 같이 돌아오기도 했다.

  그 덕에 아주 어릴 때 광주, 여수, 서울 등으로 이사를 많이 다녔다. 서울에서 국민학교 1학년 1학기 입학했을 때 한 반에 학생이 60여 명에 12반이었다. 게다가 오후반으로 학교에 갔다. 집은 반지하 조그만 방이었고 아버지가 일 끝나고 양주와 콜라 세트를 사 와서 먹으려고 할 때, 콜라는 내가 마시겠다며 달라고 했던 기억이 있다. 엄마는 맨날 술만 먹는다며 바가지를 긁었고 그날도 싸웠다. 결국 2학기때 할머니가 서울로 와서 나를 데리고 밤골마을로 갔고 읍내에 있는 한 반에 24명에 반이 2개뿐인 작은 학교로 전학을 갔다.

  서울에서 살다가 밤골마을에 돌아와서 얼마 안 있다가 어머니는 돈 많이 벌어서 맛있는 거 사준다며 집을 나갔다. 그때부터 나와 동생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살았다. 애지중지 귀한 손주로.


  계속 밖으로 돌아다니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와서, 도시에서 공부해야 좋은 학교를 갈 수 있다며 나와 동생을 시내에 있는 12반까지 있는 큰 학교로 전학을 시켰다. 그리고는 사글셋방에 두고 사라졌다. 그리고 며칠 있다가 어머니가 돌아왔다. 10년 만에.


  그 후로 아버지가 술을 끊으시는 듯하더니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서 이번에는 아버지와 헤어졌고, 이때부터 어머니와 살았다. 폭탄 돌리기 놀이가 생각났다.




  고등학교 3학년 대입을 준비할 때 하늘을 나는 파일럿이 되고 싶었다. 공군사관학교 입시설명회를 들었는데 충치가 있으면 안 된다고 했다. 치과에 갔더니 이빨이 6개나 썩었단다. 엄마는 카드 할부까지 긁어 가며 150만 원이나 결재하고 전부 치료했다.

  조종사가 되려면 시력도 1.0 이상이어야 했다. 그때 시력도 급격하게 나빠졌다. 한 번도 1.5 밑으로 떨어져 본 적이 없는데 고3 여름에 0.4로 떨어졌다. 중3 때부터 야자를 해서 항상 졸리고 눈앞에 흐린 듯해서 안과에 갔더니 난시가 있어서 그렇다며 시력 관리를 해야 한다고 했다. 나만 야자를 한 것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있던 시절도 아니고 집에 컴퓨터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파일럿으로 하늘을 나는 건 불가능해졌다.


  비행기에 탑승하는 승무원이나 기술자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대학교를 서울, 인천, 경기 쪽으로 가야 했다. 그렇게 가려면 등록금, 책 값, 기숙사비 혹은 자취방 월세 같은 것들이 생각보다 많이 들었다. 대학이라는 곳 근처에 가본 적 있는 어른이 없으니 그런 값이 든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우리 집 형편에 그 많은 돈을 마련할 수 없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다.


  대학교를 포기하고 취업을 빨리 할 수 있는 모 대학교 부설로 있는 직업학교에 갔다. 꿈이 문제가 아니었다. 동생이 대학교를 가기 전에 취업을 해야 했다.




  2학년  취업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학교 게시판에 붙어 있는 육군 3 사관학교 포스터를 봤다. 대학교 3, 4학년 과정을 하는데 학비 무료, 기숙사 무료, 의식주 전부 해결이고 졸업하면 바로 직업군인인 장교가 된다고 했다. 바로 지원했다.

  나는 사관학교에 들어가서 드는 돈이 하나도 없었고, 그 덕에 동생은 집 가까운 국립대학교를 갈 수 있었다. 어머니는 더 이상 길거리에서 포장마차를 하면서 추운 데서 떨지 않아도 됐다.




  사관학교에 가서 교육받는 중에 입교식 영상을 종종 보여줬다. 입교식은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사관생도가 된다 하여 부모님은 물론이고 가족 친지 모두 초대해서 하는 행사였고, 영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뜨거워진다. 아주 좋은 정신교육 자료다. 왜 군대만 가면 다들 효자가 되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나도 그땐 그랬다.

  행사에 어머니, 외할머니, 여동생이 왔었다. 영상 속에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데, 어머니가 '뒤돌아' 눈물을 훔치는 장면이 잡혀 있었다.

  "네가 사관학교에 갔을 때 엄마도 주변에 자랑 많이 했었어."

  멋진 제복을 입고 행진하는 모습을 보니 그동안의 고생이 다 이 순간 때문인 것 같았다고 회상하셨다. 이번에는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훔쳤다.

  "네가 그때 00 직업학교를 안 가고 사관학교도 안 가고, 그냥 00 대학교 갈 수 있게 내가 더 해줬어야 하는 건데......"

  내가 아픈 것이 성격에도 안 맞는 군대에 억지로 가서 그렇다고 생각하셨다.







  고3 때 부모님이 다시 이혼하고 어머니와 살면서부터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는 안 갔다. 그렇게 4년 정도가 지나고 사관학교 3학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정복을 입고 그대로 동네에서 하는 장례식에 갔다. 나를 그렇게 애지중지 키웠던 할머니도 4년 만에 만났는데, 치매 때문에 둘째 작은 어머니의 부축을 받고 계셨다. 4년이 너무 길었던지 정복을 입고 온 손자를 보고 저분은 누구시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첫날 왔다가 어머니가 있는 것을 보고 바로 자리를 떠나버렸다고 했다.


  장례식보다 내가 사관학교에 갔다는 것이 더 큰 이슈가 돼 버렸다.

  "이제 네가 성인이 됐고 자리도 잡았으니까 집안 제사도 챙기고 증조할머니 묘지 이장도 챙겨라."

  작은 아버지들은 나도 남자라고 어른들이 집안 대소사를 상의하는 자리에 불러 앉혀놓고 말씀하셨다.

  "아직 학생인 애한테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당신들이 다 알아서 해서 물려줄 생각은 안 하고, 쯧......"

  항상 이렇다. 작은 어머니들은 이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없는 집안에 자부심만 갖고 있다며, "전주 이 씨 집안사람들은 왜 저럴까"하면서 남편들을 혼내고 자식들 편을 든다.

  작은 아버지들은 전라감사였던 할아버지의 손자들이라는 자부심이 있었고, 그래서 모이기만 하면 종묘라도 만들 것처럼 선조들의 묘지를 한 군데 모아야 한다며 언제 할 것이고 돈을 얼마나 모아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했다. 마치 궁궐에서 왕과 대신들이 중대사를 논하는 듯한 말투로.

  증손자가 사관학교에 갔고 곧 장교가 된다니 집안이 무관이 다시 탄생한 것이다. 이 얼마나 명분이 좋은가. 그 이야기를 듣는 주변 사람들은 묘지에 돈 들이지 말고 지 새끼들이나 잘 살게 하라고 하면서 뒷말을 했다.


  


  "성민아, 네가 이렇게 잘 돼가지고 고향에 왔구나. 고맙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얼마나 좋아하셨겠냐......"

  오랜만에 만난 동네 어른들은 내 손을 잡고 격려와 함께 '고맙다'는 말을 그렇게 하셨다.  전라감사의 첩으로 들어간 증조할머니가 남편이 돌아가신 후에 집을 나오고, 아무것도 없는데서 다시 살아나가다 보니 자손들은 제대로 된 자리 하나 찾지 못하고 살았다. 자식들은 변변찮아도 손자가 나랏일 하는 사람이 돼서 나타났으니 밤골마을에서는 경사였다. 장례식인데.


  어른들께 인사가 어느 정도 끝날 때쯤 둘째 작은 어머니가 급하게 날 불렀다. 할머니 정신이 돌아왔다는 것이다.

  "네가 성민이냐?"

  할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끌어안고 오열하셨고, 그날 밤은 7년 만에 할머니 옆에서 잠을 잤다. 예전처럼 할머니 팔베개를 벨 수는 없었지만 옆에 계신 것만으로도 포근했다.

  



  할머니는 다음 해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그다음 해에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그때마다 나는 장례용 검은 정장이 아니라 정복과 군복을 입고 있었다.

  "셋 다 어쩜 그리 시간도 잘 맞춰 돌아가셨을까 잉."

  어머니가 말했다.




  


  "오빠 나도 작년에 치료받았어. 먹으면 금방 좋아져."

  사촌동생이 말했다.

   

  결혼해서 가장이 된 상태에서 제대를 해야 했고, 10여 년의 군 생활이 끝나니 불안정한 생활이 이어졌다. 예전부터 있었던 우울감도 더 심해졌다.

  제대하고 보험영업을 하느라 가족, 친지들 중 상당수가 나의 고객이 됐었다. 사촌 여동생도 그중에 한 명이었다. 보험에 대해 물어볼 게 있다며 전화가 왔다. 그땐 이미 그만두고 난 후였다.

  "미안해. 오빠 그만뒀어. 몸이 좀 안 좋아서."

  말을 듣더니 사촌동생은 약 잘 챙겨 먹으라고, 날씨 좋아지면 제주도 놀러 오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도 작년에 공황장애 진단받고 치료받았다고 했다. 들어보니 사촌동생들 대부분이 정신적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겪었었단다.

  



 열심히 살지 않은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할아버지는 홀로 될 자신이 없어 제일 먼저 하늘로 가셨다. 할머니는 화병을 달고 살다가 치매를 앓았다. 아버지는 가족보다 술을 하다가 그 술에 당해서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현실 속에 살아보려 발버둥 치다가 평생을 홀로 보내고 있다.


  그 결실로 내가 성공하는 듯했다.




"나는 차를 타고 벗어났다. 기분이 좋았다. 움직이니 기분이 좋았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몰랐다. 단지 나는 운전을 할 뿐이었다."

<욘 포세 장편소설 샤이닝 중>

  


이전 06화 여동생과 연을 끊은 사소한 것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