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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민 Apr 10. 2024

경단녀 12년만에 일 나가다.

아내 이야기

  옆에 한 남자가 있다. 따뜻한 마음씨를 가졌고 착하기도 하고 생긴 것도 이 정도면 귀엽고 준수하다. 코를 곤다. 이럴 때는 고개를 살짝 밀거나 당겨서 돌려주면 괜찮아진다. 요즘 들어 몸이 힘든지 자면서 끙끙 앓는다. 누구 때문에 또 마음이 아플까. 이건 어떻게 해줄 수가 없다. 아침에 쌍화탕 하나 혀줘야겠다.


  새벽에 갑자기 내 배를 만진다. 말랑하다며 내 배 만지는 것을 좋아한다. 난 싫은데. 저러다 손이 위로 올라가기도 하고 아래로 내려가기도 한다. 귀찮고 피곤해서 그냥 자라고 손을 빼버렸다. 그랬더니 금세 또 코를 곤다. 그 덕에 난 잠을 설쳤다.


  아침에 쌍화탕을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컵에 따라 주고 이 남자가 출근하고 나면, 아이들에게 학교와 학원 스케줄을 재확인해서 숙지시키고, 나도 출근한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6년 정도 지나서 교육청에서 사회복지사로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성격상 일을 할 때는 사람을 보지 못한다. 일만 보인다. 불우 학생들의 학교 생활 적응을 돕는 일을 하고 있으나 사람보다 일 자체가 더 잘 보인다.

  학교에서 일하는 실무자들은 나 때문에 힘들어한다. 사람이 좋아 이 일을 선택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사람 좋아하는 사람들은 일 자체보다  사람 때문에 상처받는 경우가 많다.  그 문제를 일이 아니라 사람으로 풀려고 한다.

  네 살 어린 선생님 한 분이 소개팅을 시켜줬다. 내가 미혼이고 남자친구도 없어서 히스테리를 부린다고 생각해서다. 서른이 넘었고 언니와 오빠도 아직 결혼을 안 해서 부모님이 간절히 바라는 일이기도 했으니 거부하지 않았다.

  앳돼 보이는 얼굴이지만 검게 그을린 피부라 제 나이로 보이는 남자가 나왔다. 후배 남자친구의 직장 상사라고 했다. 말도 잘 통하고 오랜만에 하는 소개팅이라 설렘도 있어서 좋았다. 다만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라는 연애 피로감이 마음에 걸렸다. 어릴 때 하던 연애를 첨부터 다시 하려니 답답하기도 하고 소모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애프터 약속을 하고 다음 주말에 다시 만났다. 오래가도 될지 확인하려고, 만나기 전에 멘토 선생님 두 분께 조언을 구했더니 심리검사 몇 가지를 권했다. 마음에 들어 신랑감으로까지 생각하고 시작하고 싶으면 재미 삼아하는 걸로 이야기하고 해 보라는 것이다. 남자도 재밌겠다며 선뜻 펜을 들었다.

  MBTI, 홀랜드, 에니어그램 세 가지를 했다. 두 번째 세 번째 만남에서 이 검사 결과에 대한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밌게 보냈다. 그 외에도 내가 지금까지 배우고 활용할 줄 아는 여러 가지 심리검사들을 남자 몰래 하면서 테스트를 했다. 검사 결과는 각 검사의 전문가 선생님들께 보여드리고 조언을 구했다. 다섯 분께 여쭸는데 베스트는 아니지만 괜찮은 사람이라고 만나보라고 권하셨다. 만남이 계속 됐다.


  사람 좋은 이 남자와 6개월 만에 결혼 약속을 하고 1년 만에 결혼했다. 결혼도 일처럼 체계적으로 처리했다.







  계획대로 난생처음 집을 떠나 타지에서 살게 됐고 아이도 둘 생겼다. 다니던 직장도 그만뒀다. 소개해줬던 후배의 목적이 달성됐다. 안타깝게 그 후배가 먼저 그만뒀지만.


  결혼하고 7년 정도 지났다. 그 사이 이사를 세 번 했다. 한 번은 전세 계약이 끝났는데 전셋값을 너무 올려달래서 옮겼고, 두 번은 이 남자가 군 장교로 복무 중이라 보직이 바뀌면 옮겨간 것이다. 결혼하면서 누구나 겪는 과정이라 생각하면서 행복하게 즐기면서 했다. 아파트 분양도 하나 받아서 내 집마련도 곧 될 수 있다는 희망도 있었다.


  근데 이 남자가 출근하는 표정이 점점 안 좋아졌다. 매일 아침 소 도살장 끌려가는 듯했다. 술자리도 부쩍 늘었다. 시아버지도 간암으로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는데 걱정됐다. 그렇다고 경력단절 여성인 내가 함부로 직장을 그만두라 이직하라 말도 못 한다. 업무 처리 절차상 비합리적이다.

  "자기야, 요새 힘들어? 표정이 안 좋네."

   일단 상황 파악을 위해 물었다.

  "아냐,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괜찮다고는 하는 데, 감이 안 좋다. 이럴 때는 매뉴얼상 예상치 못한 상황이 안 생기도록 관리하면서 다음을 대비해야 한다.

  "자기야, 군 생활 정 힘들면 그만둬. 대신 아직 시간 좀 있으니까 2~3년 정도 준비해서 새로운 일도 찾아보고 애들 학교 들어가기 전에 한 곳에 정착하자."

  군 장교 들는 이사를 자주 해야 한다. 아빠도 예전에 이사 자주 다니면 아이들한테 안 좋다고 정착하라고 하신 적이 있어서 이 핑계로 말하니 부드럽게 받아들여졌다. 둘째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 갈 때쯤 나도 다시 일을 하려고 했는데 좀 이르다. 이 남자가 조금만 더 견뎌주면 좋겠는데......

  

  




  새벽 5시 40분, 곧 일어날 시간인데 갑자기 이 남자 호흡이 가쁘다. 엎드려 무릎을 꿇고 머리 박고 신음하고 있다. 누워보라고 똑바로 눕히는데 온몸에 경련이 일어난다. 주물러서 풀어보려고 하는데 손이 몸에 닿는 것도 고통스러워한다. 큰 아이에게 동생 챙겨서 시간 맞춰 학교 가라고 깨워놓고 응급실로 갔다.


  의사인지 간호사인지 구분할 수 없는 사람들이 6~8명 붙어서 호흡기와 각종 호스, 줄 같은 것들을 붙이고 혈압 재고 채혈도 한다. 응급실 중환자 명단에 이 남자의 이름이 있다. 아직 눈을 못 뜨고 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눈 좀 떠봐.'


  한 시간 정도 지나고 진정되고 나서 잠든 모습을 보고 있는데, 의사 한 명이 와서 일어나면 돌아가라고 한다. 기본적인 검사들의 결과는 별 특이점이 없단다.

  이 후로 두 번 더 응급실을 갔다. 가슴의 심장 있는 곳이 아프다고 했다. 심장내과를 계속 갔는데 마지막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이 심장은 아니라고 신경정신과를 가보란다.


  차마 말할 용기가 안 난다. 정신과라니. 심장이 아픈 건 말하겠는데, 마음이 아프니 병원에 가라는 말이 안 나온다. 아무리 우울증 약을 감기약 먹듯이 먹는 시대라고는 해도 아직은 그렇다. 이 남자도 못 받아들이겠지만 나도 무섭다.


  "나 병원 예약했어. 다음 주에 가기로 했어."

  이 남자가 정신과 진료 예약을 했다고 카톡을 보내왔다.

  "잘했네. 쉽지 않았을 텐데......"

  마지막 병원 갔다 온 후로 5개월 만이다. 이 남자가 더 하겠지만 나도 긴장된다.

  

  두 번째 진료 가더니 약을 받아왔다. 심장이 아픈 게 아니고 아프다고 착각하는 거란다. 공황장애라고. 전역하고 돈을 많이 벌고 싶다며 말도 안 듣고 성격에 맞지도 않는 보험영업이며 인쇄공장 노동을 하거니 결국 탈이  것이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인 걸 알고 결혼했는데, 본인은 모른다. 스스로는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사람한테 스트레스받는 일들만 골라하고 다닌다.


  그만두게 했다. 6개월에서 1년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둘째가 아직 어리긴 하지만, 나도 일해서 같이 벌면 살 수 있다.



  



  

  이 남자는 다행히 1년의 휴식과 준비 기간을 거쳐서 건강도 어느 정도 회복했고, 박봉이긴 하지만 다시 일을 시작했다. 나도 12년 만에 경력단절을 끝내고 운 좋게 결혼 전 하던 일과 같은 분야로 취업했다.

  아무리 궁해도 길은 있는 법인가 보다. 1년 정도 놀면서 모아둔 돈을 거의 다 써버렸지만, 새 출발이 나쁘지 않다.

 

  12년 만에 다시 세상으로 나가려니, 긴장된다.




고마워.

- 이 남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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