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성민 Apr 14. 2024

너 자신만 생각하고 살아도 돼!

엄마는 엄마, 아빠는 아빠, 나는 나

  "생일 축하 합니다~ 생일 축하 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준호~ 생일 축하 합니다."

  가족이 다 모여서 둘째 아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대구에 사는 아이 삼촌이 케이크를 배달시켜 줬고, 춘천에 사는 이모는 영상 통화를 했다. 창원에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는 반찬과 과일 등을 택배로 보내왔다. 둘째 아이는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받은 편지, 가족과 친척들에게 받은 선물들을 정리하다가도 방과 거실 이곳저곳을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노래를 부른다.


  "엄마, 나 숙제 미리해놓을까?"

   첫째 아이는 정해진 시간만큼 게임을 하고 있는데, 둘째 아이가 다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기분 좋은 김에 더 칭찬받고 싶은가 보다.

  "해 놓으면 좋지."

  엄마가 답을 하는데 첫째 아이는.

  "엄마 나 한번 더."

  아이들이 매일 스마트폰 게임 시간을 정해 좋고 30분 단위로 한 타임씩 하는데, 두 번째 타임을 이어서 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이 타이밍에.

  "윤호 너도 수학 문제 풀이 숙제 미리 해놔, 내일 놀려면."

  알았다고 답을 하면서도 뭉그적뭉그적 하고 있다. 그 모습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한마디를 해버렸다.

  "윤호 너 그렇게 게임에 빠져서 할 일 안 하면 내일부터 게임 시간 없어."

  하던 게임을 그만두고 숙제를 하겠다고 답하는 것만 해도 12살 아이에겐 훌륭한 일임에도 아이가 잠시 미적거리는 모습을 보는 것도 견디지 못했다. 생일 파티 끝나고 좋았던 분위기를 다 망쳐버렸다.

  "준호 생일이니까 엄마는 오늘 준호 옆에서 자야지."

  아이들 엄마가 분위기 풀어주려고 화제를 돌렸다.

  "나도 준호 옆에서 자야지."

   첫째 아이도 잘 받아넘겨 줬다. 나는 조용히 옆 방에 들어가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반성했다. 다행히 거실에선 웃음소리가 들린다.  




  [아버지의 삶은 아버지의 것이고 어머니의 삶은 어머니의 것이다. 나는 한 번도 어머니에게 왜 이렇게 사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것은 아무리 어머니라 해도 예의에 벗어나는 질문임에 틀림없으니까.]

  - 양귀자의 <모순> 中 -






  아내는 태어나서 30년 넘게 고향을 떠나서 살아본 적이 없다. 그러다 나랑 결혼하면서 직장도 그만두고 창원에서 속초까지 이사 가서 살았다. 아이들을 키울 때 3살까지의 기억이 제일 중요하다고 어떤 것보다 그 시기를 지켜주고 싶다고 했다. 아이가 태어났고 모든 것을 아이들에게 맞췄다.

  

  "자기야, 내일 주말이니까 애들 데리고 설악산 좀 가보자. 풍경이 너무 좋데."

  아내가 말했다.

  "피곤한데 좀 쉬면 안 될까?"

  매일 야근에 주말은 2주에 한 번꼴로 당직근무를 서야 하기 때문에 한 주만이라도 제대로 쉬고 싶었다.

  "애들이랑 보내는 시간, 이때 아니면 없어. 우리 일은 좀 못 하더라도 이건 좀 해줘야지, 맨날 잠 만 자냐?"

  아내의 변함없는 신조다.

  "내가 진급도 하고 잘 돼야 아이들한테도 잘해줄 수 있는 거지. 내가 진급 떨어지고 전역해서 아이들 한참 클 때 경제 사정 불안해지면 어떡할래? 지금 나도 중요한 시기잖아."

  항상 이런 때문에 싸운다. 간격이 좁혀지지 않는다. 닭이 먼저일지 달걀이 먼저 일지.




  불행인지 다행인지 난 진급에 떨어졌다. 계급별 정년 때문에 전역하기 싫어도 할 수밖에 없게 됐다. 장인어른께서도 예전에 '자네 언제 한 곳에 정착해서 살건가? 이사 자주 다니면 아이들한테 안 좋아.'라고 하신 적이 있다. 그땐 표현하지 못했지만 참 애석하게 들렸다. 나보고 내려와서 농사 지으라는 이야긴가? 처가 쪽 분위기는 그랬다.

  장인어른은 군대 이야기를 간혹 하셨다. 매번 빠지지 않고 포함시키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집 가까운데 근무하고 싶어서 취사병 할 때 취사반장한테 별의별 아부를 다 했다는 이야기였다.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 부대 좀 옮겨주면 안 되냐고, 엄살도 부리고 협박도 했다고, 그래서 결국 옮길 수 있었다고 하셨다.    


  난 전역하고 나서도 우선 내가 잘 돼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직업군인들은 전역할 사회적응기간을 주고 차근차근 적응할 있도록 해준다. 그것도 못 참고 조급함에 전역처리가 되기 전부터 성격에 맞지도 않은 보험영업을 시작했다. 기왕 전역한 거, 현역에 있는 친구들보다 잘 살아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이었다. 혼자서 7 to11이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7시에 출근, 11시 퇴근하면서 사회적응에 열중했다. 사업 경험을 해보겠다며 인쇄 공장에서 일할 때도 하루에 3~4시간 자면서 주말도 없이 육체노동을 했다.

  더운 중국집 주방에서 손에 칼자국 내고 기름에 데면서 기술 배우는데 열중했던 아버지처럼, 포장마차 밤 장사 하느라 우리 얼굴 한 번 보지도 못했던 어머니처럼, 나도 그렇게 하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래도 잘 견뎌줬지만, 나는 중간에 멈췄다.

  멈춰 보니 아내가 제일 먼저 변해야 했다. 아이들이 중학교 갈 때쯤 다시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당장 수입이 없으니 일을 새로 시작해야 했다. 남편이 집에 있으니 본인이라도 정신 차리고 아이들이 흔들리지 않도록 해야 했다.

  아이들은 일 하러 가던 아빠가 집에만 있으니 놀아줄 시간이 많아져서 좋긴 한데 뭔가 이상하다. 엄마는 자주 하던 외식도 앞으로는 줄여야 할 수 있다고 말을 하니 기분이 안 좋다.

  내 어머니는 아들이 쉰다고 하니 할머니를 원망할 정도로 힘들어했다. 자신의 삶 자체가 잘 못된 건지 의심스러워하기도 했다.

  하늘에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는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멈추기 전과는 분명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내게 이런 조언을 했다.

  "너 자신만 생각해. 부모님 인생은 부모님 인생이고, 아이들은 아이들이야."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양귀자 소설가도 자신의 그런 생각이 모순이었다고 말했다.


  전라감사였던 증조할아버지, 막내 첩이었던 증조할머니, 아들이었던 할아버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와 동생까지 이어지는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삶을 살았다. 그들에게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왜 그렇게 살았는지 따져 물을 수는 없다. 그들의 인생이 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중심이 되면 달라진다. 아버지와 어머니 당신의 인생에 대해 내가 논하면 안 된다. 하지만 나의 아버지, 나의 어머니라면 원망도 해야 하고 싸우기도 해야 한다. 그래야 용서할 수 있다. 용서가 안 되면, 어머니가 아닌 '나의 어머니'를 끊임없이 원망하고 살게 된다.

  그 원망은 책임감, 압박감, 화로 넘어가서 미적거리고 있는 아이를 보고 나도 모르게 화를 내서 분위기를 망친 것 같은 일이 생긴다. 더 중요한 건 그 때문에 스스로를 골방에 가두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전 08화 경단녀 12년만에 일 나가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