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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민 Apr 01. 2024

여동생과 연을 끊은 사소한 것

여동생 이야기


여동생한테 전화가 왔다. 십 분 정도 본인 할 얘기를 퍼부었다. 주요 내용은 명절 때 왜 집에 안 오느냐, 엄마한테 왜 이렇게 신경을 쓰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한참 조용히 듣고 있었는데 갑자기 숨이 잘 안 쉬어지고 심장이 요동치면서 가슴부터 목구멍까지가 답답해졌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런 말 할 거면 앞으로 연락하지 마. 난 이제부터 여동생 없어."

태어나서 지금까지 가족 중에 유일하게 한 번도 인연이 끊기지 않았던 여동생에게 절연 통보를 했다.






최근 명절날인데 고향이 안 간지 2~3년 정도 됐다.

대학을 다닐 때까지는 그래도 명절에는 집에 가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다. 무궁화호 8시간씩 입석으로 타고 내려가기도 했고, 기차표를 구하면 외삼촌차를 얻어 타고 23시간 동안 보조석에서 지도 들고 내비게이션 역할을 하면서 갔다. 집에 간다고 해서 딱히 행복하거나 즐겁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모셔져 있는 납골당에 잠깐 갔다 오고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에 잠깐 다녀온다. 친척들은 사정에 따라올 때도 있고 올 때도 있었다. 그리고 나면 엄마와 동생은 안방에서 나는 거실에서 TV를 본다. 명절 내내. 그러다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뉴스에서 많이 보도하는 명절 민족대이동에 나도 포함됐다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증명 정도의 의미였다.

장교가 이후부터는 명절에 집에 가지 않았다. 간부로 복무하는 동안은 부대 행사나 당직근무 때문에 집에 못 가는 것이 평범한 사람이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10여 년 넘는 기간 동안 명절날 집에 가는 것은 딱 두 번이었고, 엄마도 이해했다. 심지어 아들이 군 장교라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결혼한 후부터는 명절마다 양가에 모두 인사를 하러 다녔다. 결혼한 사람들은 다 그렇게 했으니까. 아내와 둘이 다닐 때는 문제없었다. 근데 아이들이 같이 이동을 하다 보니 계속할 없었다. 멀미하고 토하고 다녀오면 며칠을 고생하기도 했다. 그래서 양가에 얘기하고 번씩 번갈아 가며 방문하기로 했다. 이번 추석에는 처가에 가는 순번이다. 처가에도 나는 3년 만에 간다. 이유는 정확히 기억 않나지만 몇 년 걸렀다.


명절에 고향에 가면 차를 타고 6시간 정도를 이동하다 보니 아내와 많은 이야기를 한다. 그 이야기는 주로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고 우리의 앞 날에 대한 이야기다.


처가에 갈 때 우리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나와 여동생을 버리고 떠난 이야기, 다시 만난 이야기, 그러다가 지금에 이른 이야기. 아내도 대략 알고는 있었으나 무슨 일이었는지 이번에는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아내가 갑자기 울었다. 내가 너무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고 살아계신 엄마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고 했다. 엄마가 어떻게 그러냐고. 난 지금껏 엄마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다음 해 특별한 계기가 있었고 나의 우울증은 더 심해져서 공황장애 됐고 하던 일을 다 그만뒀다.






태어난 이후로 나와 함께 보낸 가족들 중에 어떤 이유로든 한 번도 연이 끈기지 않고 이어져 온 것은 여동생 한 명뿐이다. 그렇다고 아주 살가운 사이도 아니지만 유일한 피붙이다.


동생은 중학교 때까지 공부를 안 했고, 학교에서 이런저런 활동들을 많이 했다. 미술 대회를 나가기도 하고 합창단에 들어가서 해외 공연을 다녔고 교회 성가대 활동을 할 때는 전국 군부대 공연도 했다. 대학을 잘 가야겠다는 생각도 그다지 없었다. 귀한 손녀긴 했지만 할머니는 딸이라고 오빠에 비하면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유일한 어른인 학교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지냈던 것이다.


동생이 중학교 1학년때 엄마가 다시 돌아왔고 이제 기댈 사람은 엄마뿐이었다. 길거리에서 장사하는 엄마를 따라다니며 심부름도 하고 집안 일도 열심히 도왔다. 오빠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고입 준비한다고 야간자율학습 하느라 자기 전에나 집에 왔다. 학원 다닐 형편은 아니었고, 놀 사람도 없으니 자연스레 엄마 따라다니는 시간이 많았다.


다행히 동생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공부를 해서 지역에서 제일 좋은 국립대학을 갔다. 게다가 장학금을 4년 내내 받았고 조기 졸업도 했다. 취업도 교수님이 공기업에 추천해 준다는 것을 거절하는 배포도 있었고, 자력으로 일반 기업 취업 준비를 해서 대기업은 아니지만 LG 계열사 중 한 군데에 취업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결혼도 엄마가 아는 사람이 소개해준 남자와 했는데, LG에 다닌다고 했다. 엄마가 아는 사람이 소개해준 사람이라 시집도 집에서 가까운 한 시간 거리였다.






동생과 나는 삶의 범위가 달랐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동생이 중학교 1학년때 엄마를 다시 만났을 때부터, 아니 태어나서부터 인지도 모른다. 나는 엄마를 다시 만났을 때 낯섦을 느꼈고 동생은 안도와 감동을 느꼈다. 엄마를 만나고 나서도 나는 학교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고, 동생은 엄마와 시간을 더 많이 보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로도 성공하기 위해 엄마가 그랬 가정을 버렸고, 동생은 사회생활을 하고 결혼 생활을 하면서도 힘들거나 막히는 일이 있을 때  필요한 것이 있을 때마다 집에 갔다.


그러니 동생은 명절날에도 2~3년에 한 번 집에 가는 나를 보면서 아들이 엄마한테 너무 한 것 아니냐며 화가 나고, 나는 그런 동생에게서 조차 연을 끊고 싶을 정도로 낯섦을 느낀다.  


끊긴 연은 동생의 아이가 감기로 못 가게 됐다면서 첫째 아이 데리고 대신 가라고 준 스키캠프 티켓 한 장에 다시 회복됐다.




같은 상황을 겪어도 그 상황을 겪어내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어떤 상태냐에 따라 모두 다르게 느껴진다.


힘겨운 시대를 살아냈던 조부모님과 부모님의 삶을 바라보는 동생은 감사함과 다행스러움을 느꼈고, 나는 책임감과 중압감에 그들을 원망했고 증오로까지 발전했다.


  이제는 다 용서하고 싶다. 나 자신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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