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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민 Mar 18. 2024

아버지의 말뚝

전라감사의 손자 이야기

자다가 갑자기 눈이 떠졌다. 야외 훈련을 나가서 사흘째였고, 전날 자정이 넘어서야 일이 다 끝났기 때문에 꿉꿉한 침낭 속이 너무 포근했다. 누가 깨워주지 않으면 제시간에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상황실에 있는 후배에서 교대시간 맞춰서 깨워달라고 부탁하고 잠자리에 들었었다. 근데 너무나 개운하게 깼다. 핸드폰을 보니 새벽 4시였다. 시간을 확인하자마자 "동생"이라는 글자가 뜨면서 진동이 울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간암이었다. 훈련 중이라 군복을 그대로 입고 장례식장으로 갔고, 삼일 동안 냄새나는 군복을 그대로 입고 식을 치렀다.






아버지가 태어났을 때 우리 집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말 그대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증조할머니가 전라감사의 첩으로 들어갔다가 집안 정치에 밀려 맨몸으로 할아버지만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와 버렸고, 친척들한테 빌어먹고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할머니가 데리고 들어 온 배다른 형과 누나가 한 명씩 있었다. 식구는 이미 네 명이었고 아버지와 네 형제가 태어나면서 식구가 여덟 명이 됐다. 아버지는 10살도 되기 전부터 1년씩, 2년씩 남의 집 살이를 시작했다. 농사 지을 땅도 없었고 장사 수완도 없어 상인이 될 수도 없었으니 할 수 있는 것은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남의 집 살이를 하면서 먹을 것, 입을 것을 얻어왔다. 10살이 넘어서 농사일을 도울 수 있을 정도가 됐을 때는 남의 집 살이를 끝내고 돌아올 때 논이나 밭 혹은 소를 한 마리씩 받아왔다. 그걸로 동생들은 읍내에 있는 국민학교를 다닐 수 있었고 식구들 입에 풀칠은 할 수 있게 됐다.




아버지가 성인이 됐을 때 우리나라는 새마을 운동, 경제개발 5개년 계획, 한강의 기적 같은 비약적으로 발전해 가던 시기였다. 그 시골 마을에서도 웬만큼 젊은 사람들은 다 도시로 나갔다. 아버지도 그때쯤 도시로 갔다.


산골 시골마을에서 남의 집 살이하면서 겨우 입에 풀칠하던 집안에서 뭘 배웠겠나. 시장에 고추며 옥수수를 팔러 갔다가 만난 중국집 사장이 있었다. 젊은 청년이 열심히 사는 게 보기 좋았던지 기술을 가르쳐 줄 테니 자기 밑으로 오라고 했다. 기술 배워서 나중에 자기 식당도 하나 차릴 수 있게 해 주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부푼 꿈을 안고 중국집 주방 보조로 들어가서 기술을 배웠다. 그렇게 도시 생활이 시작됐다.




아버지는 태어나면서부터 남의 집 살이하면서 집안을 보살폈다. 제대로 한 번 살아보고자 기술을 배우러 갔으니 얼마나 열심히 했겠는가. 어린 내 눈에도 아버지 손은 항상 상처투성이였고 살갗은 다 부르터 있었다.


사람은 절박함이 있으면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는 법이다.


아버지는 기술 배우는 데 모든 걸 쏟아부었다. 장사 준비를 위해 새벽 시장에 가서 재료를 직접 사 와서 손질했고, 점심, 저녁 장사 끝나는 것까지 직접 다 챙겼다. 실제로 하루에 잠자는 시간은 두세 시간뿐이었다. 잠을 제대로 자면서 주방 일을 해도 버티기 쉽지 않은 일이다. 한 여름의 중국집 주방은 한증막보다 더 다. 70년대 중국집이면 요즘 같은 시설도 안 돼 있을 때다. 그러니 아버지는 한두 달이면 지쳐버렸다. 기술을 배우고 열심히 일하는 것만 했지, 처세를 배우지는 못 했다.  






아버지는 가끔 전주 이 씨 집안 제사와 문중 행사가 있다며 나를 데리고 다녔다. 그곳에 가면 나를 장손이라고 소개했고, 그 소개를 받은 아버지보다 나이 많으신 아저씨는 촌수가 높다며 나에게 존대를 하기도 했다.


명절에 작은 아버지들이 다 모이면 아버지는 족보를 펼쳐 보이며 우리 할아버지가 누구고 어떤 직책을 맡고 계셨고 하는 식의 가르침을 내렸다. 아버지의 할아버지 때까지만 해도 우리 집안은 전라도 일대에서 제일 큰 부자였고 권세가였다고 했다. 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조선의 전라감사였다.


아버지는 한 때 과거 우리 집안의 권세를 되살리기 위해 노력 하기도 했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대통령 선거에 나왔을 때 마을에서 청년 회장을 맡아서 선거운동을 했다. 한 날 집에 들어오면서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라는 제목의 책을 여러 묶음 들고 들어왔고,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그때 아버지가 정주영이 아니라 김영삼 편에서 선거운동을 했다면 다시 집안을 살릴 수도 있었을까?


아버지는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사람은 누구나 한 때의 영광을 잊지 못한다. 그 말뚝에 한 번 묶이고 나면 쉽사리 벗어나지 못한다. 근데 그 말뚝은 수십 년, 수백 년을 거슬러서 박히기도 하는 것 같다. 현실이 밑바닥일 수록 그 말뚝은 더 강력해진다.






한 때는 맨날 술에만 취해있는 아버지가 없었으면 하는 생각도 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삼 일 동안 난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집안의 가장으로서 가족을 지키겠다는 마음이 컸지만, 한편으로는 입안에 박혀서 계속 신경 쓰이던 가시가 빠진 기분이 들기도 했기 때문이다.


장교가 된 후로 아버지와 연락이 닿은 적이 없었다. 돌아가시기 삼 년 전부터였던 것 같다. 예상이라도 했던 것처럼.




"아버지,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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