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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민 Mar 11. 2024

나가 자네보다 먼저 죽어야 쓸것인디

할아버지 이야기


"나가 자네보다 먼저 죽어야 쓸 것인디."

"쓰잘데기 없는 소리 허지 말고 주무씨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날 할머니와 한 마지막 대화다.  




할아버지는 조선시대 전라감사의 막내아들로 태어나서 대궐 같은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비록 어머니가 첩이긴 했어도 최소한 아버지가 살아계시는 동안은 금쪽같은 막내 아들이었기에 귀한 대접을 받으면서 자랐다. 조선시대가 끝나고 100년 이상 지났어도 아직 남녀평등이라는 주제를 법으로까지 정해 놓고 지키고자 하는 게 우리나라 아닌가.


할아버지 인생의 가장 큰 사건은 어머니가 자신을 데리고 집을 나온 것이다. 집에서 살 때는 먹고 자고 입을 것들은 걱정하지 않고 살았다. 집안에서는 첩의 자식으로 괴롭힘 당하고 대접도 못 받았을지 몰라도, 밖에 나오면 전라감사 출신의 아버지가 있었던 집안의 자식으로 대접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외가 식구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는 산골 시골 마을로 오면서부터 하루 세끼 끼니 때울 걱정을 해야 하는 신세가 됐다. 다행이 외가 식구들이 자그마한 집과 농사 지을 논밭 빌려줬지만 홀어머니와 둘이 살게 됐으니, 크게 둘러쳐져 있던 울타리 밖을 맨 몸으로 나온 셈이다.





성인이 된 이후에 결혼을 할 때가 돼서 주위에서 여자를 소개받았다. 결혼식 같은 거창한 행사는 못했지만 짝이 있어야 했기에 소박하게 치르고 지냈다. 근데 들어오는 여자마다 아이가 안 생겨서 2~3년을 못 버티고 나가버렸다. 그렇게 부인이 세 번이나 바뀌었지만, 결국 혼자가 돼서 어머니와 살았다.


그 뒤에 할머니가 왔다.


 




할머니는 고흥 사람이다. 할아버지와 결혼을 할 시점쯤에 남편이 일찍 죽고 자식 둘을 혼자 키우고 있었다. 그 자식 둘이 목포에 살던 큰아버지와 벌교에 살던 고모다. 할머니는 남편을 일찍 잃고 혼자서 고흥 바닷가에서 해산물을 캐다가 시장에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면서 살고 있었다.


평소처럼 시장에서 장사를 하다가 할아버지의 외가 식구를 만나 소개를 받은 것이다. 00리 마을에 부인이 세 명이나 바뀌는 동안 아이를 못 낳아서 홀어머니 모시고 사는 남자가 있단다. 사람은 착하고 성실해서 먹고사는 데는 문제없을 것이고, 아이 둘 키우면서 짝으로 삼기에 괜찮을 거라는 말을 들었다. 할머니가 생각하기에도 자식이 둘이나 딸린 여자를 데리고 살만한 남자는 흔치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이를 못 낳는 것 때문에 부인이 계속 바뀌다가 혼자 살고 있는 남자라니, 당신의 자식들만 잘 키우면서 살면 되겠다 싶었다.


그래서 할머니는 자식 둘을 데리고 00리로 와서 우리 할아버지와 같이 살게 됐다.


그런데 웬걸. 몇 년 지나고 나니 슬하에 자식이 넷이나 더 생겨버렸다. 그것도 아들만. 자식을 못 낳아서 여자가 세 명이나 집을 나간 남자라서 편하게 살면 되겠다 싶어 왔더니, 이게 무슨 일인가?






할아버지도 황당했다. 전에 살던 여자들은 나 때문에 아이를 못 낳는 거라고 하고 다들 나가버렸는데, 이 여자는 들어오자마자 아들을 넷이나 낳아버렸다. 농지라도 있었다면 자식들은 온전히 노동력이 되지만 없는 집안에 자식이 여섯이나 됐으니, 이제는 정말 먹고사는 게 심각해졌다. 외가 식구들이 많이 모여 있는 마을이라고는 해도 산골 시골 마을이라 자원이 풍부한 곳이 아니다. 여기는 일제강점기나 한국전쟁이 있을 때도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고 지냈을 정도로 있는 듯 없는 듯 한 곳이다.


할아버지는 집을 나와 이곳으로 온 이후에 어머니와 함께 빌린 집과 빌린 논밭에 못하는 농사일을 하면서 근근이 먹고살았다. 현실적인 생각을 하거나 생활력이 있는 편도 아니기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다행히 아내(할머니)는 생활을 해야겠기에 나름의 방법을 강구했다. 먼저 결혼 전에 데리고 온 두 자식을 빨리 분가시켰다. 큰 아들은 고흥에 살 때 알고 지내던 배 타는 분한테 보내서 바닷일을 배우게 했고, 딸은 시장에서 장사할 때 알고 지내던 친구네 집 아들과 일찍 결혼을 시켰다.


할아버지는 모른 채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들 넷을 키울 때도 마찬가지였다. 할머니는 먼저 분가시킨 자식들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는지, 당연하다고 인식됐었던 아들 중심의 사상 때문이었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들 넷을 키우는 데 모든 것을 걸었다. 근근이 살면서 어렵게 모아 놓았던 논, 밭도 아들들의 객지 생활을 지원해 주기 위해 다 팔아버렸고, 남의 집 농사에 일당벌이로 모아서 겨우 소 한 마리 사서 키우면 그 소도 팔아서 다 아들한테 줘버렸다. 그것도 큰아들한테 거의 몰빵 하듯 줬다.


할아버지는 귀가 안 들려서 그런 것인지, 내 자식들이라 그런 것인지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큰 아들이 결혼을 하고 나서 낳은 손주가 둘 있다. 결혼한 큰 아들이 잘 살아줬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좋아했던 며늘아이가 집을 나가버렸다. 며느리가 임신해서 입덧할 때 유일하게 잘 먹었던 음식이 남의 집 농사 품앗이 갔을 때 새참으로 나와서 주인집에 사정해 가지고 남은 음식 몽땅 얻어다가 주기도 했는데.

큰 아들놈은 돈 벌로 간다며 도시로 나가버렸다.


모르긴 몰라도 할아버지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내가 전라감사처럼 높은 직위에 있어서 부인이 여럿 있는 것도 아닌데, 아들들은 첩의 자식도 아닌데, 왜 며느리가 집을 나갔을까?"

결국 아들들이 독립할 쯤에 다시 손주들이 할아버지와 할머니한테 맡겨졌다. 내 한 몸 겨우 부지하다가 겨우 먹고살게 됐고, 뜻하지 않게 생긴 자식들한테 한평생을 다 바쳤는데, 손주들한테 또 한 세월을 바쳤다.


할아버지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귀가 더 안 들려 간다. 나이 80세가 넘어갈 때쯤, 평생의 세월을 자식들도 손주들도 떠나고 곁에 남은 사람은 아내 밖에 없다.






권력과 돈을 모두 가진 아버지 그늘 밑에 귀하게 살다가, 어머니를 따라 집을 나올 때부터 귀머거리였다. 어쩌면 그때부터 세상은 할아버지를 가뒀는지도 모른다. 권세가의 첩의 아들로, 평생을 자식과 손주를 위해 살았던 아내의 남편으로, 산골 시골 마을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 치는 자식들과 손주들의 아버지로, 할아버지로, 노년을 지나 하늘로 가는 길에서 돌이켜보면 평생 동안 퍽이나 답답한 수렁 속에 갇혀 지내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외로웠을 것이다.


마지막에 옆에 할머니마저 없었다면 얼마나 두려웠을지.


"나가 자네보다 먼저 죽어야 쓸 것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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