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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민 Mar 04. 2024

조선 마지막 전라감사의 증손자

전주 이씨 집안의 장손

"얘가 큰 형님 아들입니다. 우리 집안 장손."


아버지는 몇 해 전에 돌아가셨고, 친가의 가족들이 모이면 작은 아버지들은 손님들께 나를 인사시키면서 항상 이렇게 소개한다. 잘 살건 못 살건 곧 죽어도 전주 이 씨 집안의 장손인 게 가장 중요하다.






40년 넘게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어머니와 단 둘이 고깃집에 갔다. 혼자 지내고 계시는 어머니가 고깃집에서 구워 먹는 고기를 먹고 싶어도 혼자서는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기에 같이 가게 됐다. 저렴한 가격에 고기만 사들고 들어가면 기본 찬에 편하게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는 집이었다.

내가 공황장애로 실직하고 나서  건강도 어느 정도 회복되고 새로운 일을 위한 준비도 어느 정도 끝난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어머니와 얽힌 감정도 풀어야겠다 생각해서 생전 처음 독대 자리를 만든 것이기에, 이 정도의 고깃집이면 만족할만한 장소다.


어릴 때 이야기도 하고 어머니, 아버지의 이야기도 하다 보니 몰랐던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조선시대 마지막 전라감사의 증손자란다. 증조할아버지가 전라감사라는 직책을 맡았었다고 한다.


전라감사라면 드라마 같은 데서 나오는 관찰사와 같은 직위이고, 지금으로 치면 전라남북도를 합한 지역의 도지사다. 아니, 당시에는 지금의 도지사보다도 더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전라도 지역의 왕이라고 봐도 될만한 분이었다. 


근데 왜 난 산골 시골 마을에서 살았을까? 어릴 적부터 들었던 그런 대단한 가문의 장손이라면 TV에 나오는 근사한 한옥집이라도 남겨서 후손들이 전통을 계승하면서 살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어머니의 말을 듣고, 이 정도 사는 것도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는 전라감사였던 증조할아버지의 막내아들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어머니, 즉 나의 증조할머니께서 첩이었단다. 그 말로만 듣던 첩.


당시는 권력이 있으면 부인을 여러 명 데리고 살 수 있는 시대였다. 증조할아버지는 전라감사의 자리에 있는 소위 말하는 권세가였고, 그에 걸맞게 부인도 여러 명이었다고 한다. 근데 그 여러 명의 부인에 중에서도 우리 증조할머니는 가장 어린 부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증조할아버지께서 살아계실 때는 집에서 평화롭게 살았단다. 가장 젊은 부인이었고 막내아들이 있었으니 얼마나 뻐했겠는가. 할아버지는 집안에서 형님들의 보살핌도 받으면서 귀하게 자랐다고 했다.


그런데 증조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정부인과 장남이 집안을 장악했고, 후부터 우리 증조할머니를 너무 못살게 굴었다고 한다. 잘 돌봐주던 형님들도 할아버지를 때리기도 하고 괴롭혔단다. 할아버지는 그때 귀를 다쳐서 돌아가실 때까지 귀가 잘 안 들리셨다. 증조할머니는 화가 나서 아들(할아버지)을 데리고 친정으로 도망 와버렸단다. 


친정에서도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없는 상태였지만 친척들이 다 같이 살면서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들을 데리고 있게 작은 한 채 빌려주고 먹거리를 조금씩 줬다고 한다. 그게 내가 태어나고 자란 시골의 산골 마을, 승주군의 밤나무가 많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밤골마을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니 다 이해됐다. 시골에 살 때도 같은 동네에서 몇 년에 한 번씩 집을 옮겨 다녔는데, 왜 그랬는지. 먹고살게 없다며 우리 부모님도, 작은 아버지들도 다 외지에 나가서 살았는데, 왜 그랬는지.


그러면서도 어른들은 나에게, 우리 집안은 원래 대단한 집안이었다고 자부심을 가지라고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아버지가 큰 집이라며 다른 지역의 가족이 많은 제사 자리에 나를 데리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으신 아들뻘의 친척도 소개받았었다.


드라마 속에서나 나올법한 조선시대의 이야기가 내 삶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조선시대는 IMF가 있기도 전이고, 민주화 운동 보다도, 격동의 70~80년대보다도 전이고, 심지어 한국전쟁, 일제강점기보다 훨씬 전의 이야기다. 그런데 그때의 이야기가 나랑 관련이 있다니.


조선 왕조의 주역이었던 전주 이 씨 집안의 장손이, 왜 매일 산에서 나무 해와서 부뚜막에 불을 피우면서 살아야 하는 그 산골 시골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는지, 이제야 알게 됐다.


더불어 왜 우리 아버지를 비롯해서 작은 아버지들이 그렇게 족보, 묘지, 장손 같은 것들을 그렇게 중요시하는지도 이제야 이해하게 됐다. 너무 잡고 싶은 닻이라 지금까지도 메여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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