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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민 Jun 15. 2023

난 어쩌다 이 일(직업)을 하게 됐을까?

내가 직업군인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화장까지 다 하고 아버지의 장례가 끝났다. 그제야 냄새나는 군복과 속옷을 갈아입었다. 볼 사람은 다 봤으니까.     




  어머니는 같은 아버지와 두 번째로 헤어지고 나서 나와 여동생의 공부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김밥, 어묵, 떡볶이 같은 걸 파는 포장마차를 시작하셨다. 그때 당시 어머니는 지금의 내 나이 정도였다. 6.25 전쟁 때 부상으로 하반신 마비가 돼서 소변도 마음대로 못 보는 외할아버지와 가진 것 하나 없이 남의 집 농사지어서 자식들을 키운 외할머니 밑에서 자랐고 맏이였다. 공부란 건 당연히 할 수도 없었고 빨리 시집가서 입이라도 하나 덜어주는 것이 외할머니나 세 동생에게 도움 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22살에 중매로 아버지를 만났고 나와 동생을 낳았는데 제대로 살아보기도 전에 이혼이라는 낙인이 찍고 도망치듯 외지에서 혼자 살아냈다. 20~30대가 그렇게 지나버리고 마흔 살에 접어들어서 자식들을 다시 만나니 뭐라도 해야 했다.


  시내에서 포장마차 손님을 많이 받으려면 오후부터 밤까지 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의 배고픔을 채워주는 것이 최고였다. 보통은 김밥, 어묵, 떡볶이 따위로 채워줬는데, 가끔은 다른 걸 찾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밤에 VIP 손님은 술 취했다가 찬바람을 맞을 때 허기를 느끼는 사람들이거나 그들을 상대하느라 진을 다 빼서 허기를 느끼는 사람들이었다. 그 허기는 가끔 서로를 향하기도 하기에 먹거리가 아니라 상대에게 칼을 꽂아서라도 채우려고 한다. 네온사인만 반짝이는 거리에서 덩그러니 있는 포장마차 하나가 있으니 ‘칼’을 찾기에 그만한 곳도 없다. 어떤 이는 이미 하얀색 와이셔츠 단추를 배까지 풀고 빨갛게 물들여서 오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손님이 올 때면 어머니는 칼 대신 ‘욕’을 한 바가지 무료로 제공해 주고는 집으로 들어와 버렸다고 했다. 여자 혼자 무서웠다고 했다.


  그렇게 벌어 온 돈으로 고등학교도 졸업했고 대학도 갔다. 여동생은 학교가 끝나고 나서나 주말에 어머니를 자주 도왔다. 김밥을 싸기도 하고 어묵을 꼬치에 끼우기도 하고 잡다한 심부름도 했다. 나도 돕고 싶었지만 도무지 부끄러워서 도울 수가 없었다. 가끔 친구 몇을 데리고 어묵이나 김밥을 먹으러 가기도 했으니 어머니가 부끄러운 것은 아니었다. 그저 사람 많은 곳에 가기도 싫고 주목받기도 싫어하고 말도 잘 못하는 숫기 없는 아이였을 뿐이다.




  대학에 다니다가 군대 갈 때가 됐다.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자원입대를 하는 이도 있었고, 남자다워지겠다며 해병대나 특전사를 지원해서 가는 이도 있었다. 나로서는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는 일이었다. 나중에 취업에 도움 된다기에 공군에 항공기 정비 특기의 부사관을 지원하려고 했다. 아무래도 병사가 아니라 간부면 숫기가 없어도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게다가 간부는 월급도 받으니까 더 이상 어머니한테 손을 벌리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러다가 학교 게시판에 붙어있는 포스터를 봤다.


  육군 3 사관학교 생도 모집!


  대학교 3~4학년 과정을 마치고 졸업하면 자동으로 장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전원 무료로 제공되는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학교에 다니는 동안 머리부터 발끝까지 옷이며 신발이며 다 지급된단다. 공부하는데 필요한 책이며 학용품도 주고 품위유지비 명목으로 20~30만 원 정도 용돈도 준다고 했다. 장교가 된 이후에도 본인 노력 여하에 따라 대학원도 무료로 보내주고 국방 정책을 수립하는 실무자나 관리자로 성장할 수 있다고 했다. 대신 군대에서 6년간은 의무적으로 복무해야 한다고 했다. 의무 6년이 문제가 아니었다. 장교가 되고 싶었다.


  저렇게 좋은 조건인데 쉽게 합격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혹시나 떨어질 것을 고려해서 차 선택으로 공군부사관을 같이 지원했다. 대학교도 그랬지만 나에게 재수나 재도전 같은 것은 사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삶을 살다 보면 느끼게 된다. 이렇게 절벽 앞에 서 있는 듯이 어떤 선택을 하면 실수할 확률이 높다.  



   

  2003년 1월 16일 육군 3 사관학교 가입교 날이다. 말 그대로 임시로 학교에 가서 입학 전까지 기초적인 훈련을 받는 기간인데도 민간인을 군인으로 개조시키는 과정이라고 하여 외부와 연락을 못 하게 한다. 전화도, 편지도, 찾아오는 것도 안 된다. 1월 23일 공군 부사관 합격자 발표날이다. 공군은 합격 여부를 알 수 없기에 선택의 여지도 없다. 가입교 했다.


  사실 나는 사관학교가 군인을 키우기 위한 곳인 줄 몰랐다. 그냥 학교인 줄 알았다. 장교는 일반 병사와 달라서 대학생처럼 학교 다니면서 품위있게 교육 받으면 되는 줄 알았다. 병사로 군대를 갔다 온 예비역 형도 나한테 그런 식으로 얘기해줬다. 다르다고.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경험한 것이 세상 어떤 것보다 어렵고 힘들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난 홍보 포스터를 보고 장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고, 보기 전까지는 살면서 한 번도 군인이 될 거란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었다.


  고등학교 때 같은 반 친구 중에 3학년 때 야간 자율 학습하면서도 밀리터리 잡지를 가져와서 보는 애가 있었다. 그 친구는 졸업하면 장교든 부사관이든 반드시 직업군인이 될 거라고 했다. 항상 탱크나 전투기, 총든 군인 모양의 피규어를 들고 다니기도 했다. 사관학교 기초군사훈련을 들어가니까 그 친구가 있었다. 통제 때문에 반가운 눈인사만 했지만 “나는 드디어 꿈을 이뤘어”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근데 그 친구는 그렇게 꿈을 이루고 곧바로 그만두고 나갔다. 나중에 동창 모임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생각보다 너무 힘들었노라고 조용히 고백했다.


  한국항공대학교 1학년일 때 학교 안에서 제복 입고 돌아다니는 ROTC 후보생들이 있었다. 학교 본관에 가려면 활주로를 건너서 가야 하는데, 학교 정문 쪽에서 활주로의 건널목 반대편 끝까지 거리가 1km는 족히 넘을 거다. 사람 눈으로는 누가 누군지 보이지도 않는 거리다. 근데 학교 정문을 들어가는 ROTC 후배 한 명이 반대편 건널목 끝 부근의 테니스장을 돌아 나오는 선배에게 경례를 한 채로 20분 넘게 각 잡고 걸어가는 것이다. 심지어 건널목에 다 와서도 선배가 못 보니까 볼 때까지 손을 올리고 기다렸다. 건널목 신호가 초록색으로 바뀌고 중간 정도 건너가서야 경례를 대충 받아주니까 그제야 손을 내렸다. ‘팔에 쥐 났을 것 같은데, 뭐 하는 짓이야, 미쳤다.’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순진한 내가 어쩌다 보니 생각보다 너무 힘든 직업인 군인이 됐다. 내가 미쳤다고 했던 ROTC 후배의 20여 분간의 경례, 나는 그보다 더 미친 짓을 사관학교에서 많이 했다.     




  한 길이 정답인 줄 알고 가다가도, 새로운 곳으로 가면 그 세계만의 길이 보이는 법이다.  


  정식 입교를 하고나서 항공대학교에서 온 우편을 어머니가 전달해줬다. 2학년 수료 성적이 과 수석인데 장학금을 못줘서 상장과 시계를 대신 보줬다고 했다.

  사관학교에서 첫 학기가 끝나고 성적이 나왔다. 510여 명 중에 467등이었다. 이 성적은 공부해서 시험을 본 것도 있지만, 생활 적응 능력, 군사학, 체력, 신체검사 결과 등 종합적인 성적이 포함된 것이다. 그중 군사학과 생활 적응 능력이 거의 꼴등이었다. 야외에서 하거나 단체로 하는 것에 점수를 매기는 것이다. 활발하게 행동하고 목소리 크게 대답 잘하고 빠릿빠릿해서 교관이나 훈육관 눈에 띄면 좋은 점수를 받고, 앉기만 하면 졸고 목소리도 작고 행동보다 생각이 앞서는 느릿느릿한 사람은 점수를 받을 수 없다. 나는 후자다.


  인생 최악의 성적을 받았고 스스로 생각해 봐도 군인으로서 자질이 부족해 보였다. 학교인 줄 알고 왔던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훈육관에게 자퇴서를 제출했다. 어머니께 전화해서 그만두겠다고 했다. 정 힘들면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마지막에 한마디가 더 붙었다.

  “근데 엄마는 아들이 사관학교에 가서 자랑스러웠다.”

  처음에는 어머니의 이 마지막 말이 안 들렸다. 아니 기억에 안 남았다.


  “이OO 사관생도에게 (……) 나는 자네가 훌륭한 장교가 될 자질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네. 생도 때 적응을 못한다고 해서 장교로 임무 수행을 못하는 것이 아니네. 오히려 장교가 된 후에 빛을 발하는 경우도 있네. 한 번만 더 생각해 보고 그래도 아니라고 생각된다면 다시 보고서 올리게. 그때는 두말없이 수리하겠네.”

  훈육관이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올법한 통상적인 표현으로 된 말, 이 아니라 편지를 줬다. 근데 그런 통상적인 표현들이 편지지 4장 가득 채워져 있었다.


  훈육관의 편지를 읽고 나니 어머니의 마지막 말이 뇌리에 박혀서 지워지지 않았다.

  “엄마는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자퇴하느냐 마느냐 하는 아주 중요하고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선택을, 수개월간 심사숙고했던 나의 결정을 간단한 이유 하나로 순식간에 바꿨다. 이후로도 이 간단한 이유 하나가 내 삶의 방향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그만둘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냄새나는 군복을 다른 사람들이 다 볼때까지 버텼다가 갈아입는 ‘직업군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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