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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민 Jun 12. 2023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를 모르겠어!

책임감과 눈치

  나는 전주 이 씨 집안의 장손이다. 맏아들이자 가장이다. 남편이자 아빠다.

  시기와 장소, 역할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모두 같다. ‘책임감’이라는 것을 가져야 한다. 동시에 '눈치'도 봐야 한다.




아버지가 죽었다. 눈물이 안 났다.


  나는 한번 잠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이 든다. 결혼 전에 10년 넘게 혼자 면서도 아침에 일어나는 것은 언제나 힘든 일이다. 그래서 중요한 날은 핸드폰 알람을 5분 단위로 10개까지 맞추곤 했다. 근데 그날은 자정이 넘어서 잠들었는데도 알람 하나도 없이 새벽 4시에 눈이 떠졌다. 그리고 바로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일 년에 한 번 연락할까 말까 한 왈가닥 여동생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빨리 내려와. XX병원이야. 아빠 죽었데.”     


  죽었데. 돌아가신 것도 아니고 ‘죽었데’라고 했다. 여동생다운 언어 선택이다. 이 아이가 왈가닥이긴 해도 버릇없거나 어른들에게 예의 없이 행동하지도 않는다.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를 가진 전주 이 씨 가문의 막내딸다운 가부장적 차별과 교육을 받은 아이다. 동생에게 아버지는 그런 존재였을 뿐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슬프고 안타깝고 불쌍하긴 하지만 살아서 동거하기는 싫은 것이다.


  부모님이 이혼한 때가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였으니까 6년 만에 듣는 아버지 소식이다. 그사이 난 직업군인이 돼서 일산에 있었고 동생은 서울에서 막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핸드폰 번호도 각각 3번, 4번씩이나 바꾼 뒤였다. 아버지한테 있는 내 연락처 4년 전 번호였다. 아버지 핸드폰에는 이혼한 전 처의 번호만 제대로 저장돼 있었다. 병원 원무과 직원으로서는 끈질기게 같은 번호를 쓰고 있는 전 부인이 자식들보다 연락하기 더 쉬웠을 것이다. 그 연락을 받은 어머니는 나라에 맡겨둔 아들보다 민간 회사 다니는 딸이 더 연락하기 편했다.


  부대와 좀 멀리 떨어진 에서 훈련 중에 연락받았다. 냄새나는 군복 그대로 버스에 탔다. 가는 중에 어머니께 전화가 왔다. 병원 말고 장례식장으로 바로 오라고 했다. 도착하니 장례 준비가 다 끝난 상태였다. 정상적이라면 벌써 시신을 확인했어야 하는데, 내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다. 무서워서 못 들어갔단다. 딱히 효도라는 것도 안 하고 전화를 자주 하는 것도 아니고 중요한 의사결정에 영향력을 가진 것도 아니지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서 그랬다. 집안의 여자 둘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나에게 든든하다며 의지했다. 그렇게 원수처럼 싸웠던 어머니도, 매일 아버지를 원망했던 동생도 시신 앞에서 오열했다. 그런데 나는 슬픔보다 다른 뭔가가 느껴졌다. 눈물을 참을 수 있었다.      




"니는 느그 아베 닮지 마라, 잉."


  어려서부터 아빠, 엄마가 제대로 있는 평범한 가정이 부러웠다.


  서울의 반지하 빌라에서 살 때도 퇴근하고 항상 술을 마셨다. 골에서 살면서 잠깐 농사지을 때도 있었는데, 그때도 항상 동네 구멍가게에서 산 막걸리나 소주를 당산나무 그늘 밑에 앉아서 먹었다. 아빠는 항상 취해있었다. 나와 동생을 도시의 학교에 보낸다며 시내로 이사했을 때는, 오토바이에 과일이나 사탕 같은 것을 싣고 다니면서 팔기도 하고 중국집 주방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때도 항상 술에 취해 있었다.


  엄마와 싸우는 것도 항상 술에 취해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그렇게 아빠는 가족들에게 창피함을 주는 사람이었다.


  부모님 두 분이 사이좋게 이야기하는 걸 본 적이 없다. 둘 중 한 명은 돈 벌러 나가 있을 때가 잦았고, 나머지는 대부분 싸우고 있었다. 동생과 나는 항상 한쪽 구석에서 울고 있었다. 국민학교 2학년 때쯤 엄마는 평소처럼 돈 많이 벌어와서 맛있는 거 많이 사줄 테니 할머니 말씀 잘 듣고 있으라고 하고 나갔다. 이어서 아빠도 서울 가서 돈 벌어 온다며 나갔다.


  그런데 주변 어른들이 다들 이상한 말을 했다.

  “니는 느그 아배 닮으믄 안 된다 잉. 느그 아배가 맨날 술 처 묵고 댕깅께. 느그 엄마가 나가 븐거여. 니는 술 입에도 대지 말고 공부만 해야 쓴다 이.”


  할머니는 다른 말을 했다.

  “니 어매가 아빠 내블고 가브럿응께. 앞으로 느그 어매는 볼 생각도 마러. 느그는 공부만 열심히 허믄 돼. 알았냐?”


  학교 선생님이나 동네 교회 목사님도 가끔 위로의 말을 해줬다.

  “인생은 오르막이 있으믄 내리막도 있는 것이다. 니도 언젠가 올라갈 수 있어. 긍께 이럴 때일수록 니가 힘내가꼬 공부 열심히 해 이.”


  아빠, 엄마 모두 잠깐 돈 벌러 가신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동네 어른들이나 학교 선생님, 명절에 찾아오는 친척들, 할머니까지 다들 날 부모 없는 아이로 불쌍하게 여겼다. 힘내라고, 공부 열심히 하라고 위로했다. 누구는 아빠가 술을 많이 먹어서 그렇다고 하고, 누구는 엄마가 책임감 없이 집을 나갔다고 했다. 결론은 책임감이었는데, 누구 말이 맞는지는 잘 몰랐다. 그저 명절 때마다 작은엄마들이랑 삼촌이 사다 주는 과자 종합 선물 세트면 다 잊을 수 있었다.      




  아빠랑 엄마가 이혼했던 거였어?


  몇 개월 만에 돌아온 아빠가 고등학교 가려면 시골에 있으면 안 된다고 우리를 데리고 시내로 이사 갔다. 그런데 아빠는 맨날 술만 먹더니 몇 달 뒤 어느 날 사글셋방에 중학생인 나와 초등학생인 동생만 두고 엄마를 찾아오겠다며 서울로 떠났다.

  

  1~2주 정도 지난 뒤 얼굴도 잘 모르는 이모가 어떤 아주머니를 데리고 왔다. 이모가 손가락으로 그 아주머니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네 엄마야.”     


  어떤 대답도 반응도 못했다. 엄마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이 안 났기 때문이다. 돈 많이 벌어 온다던 엄마는 예상보다 귀티 나보이지 않았다.     


  그 아주머니가 엄마라는 것을 인식하고 나서 우리는 방에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제야 모든 것을 알게 됐다. 어른들이 왜 우리를 부모 없는 아이들이라고 했는지, 친척들은 왜 우리에게 명절마다 거액을 써가면서 옷이며 과자 선물 세트며 선물을 사다 줬는지, 동네 사람들은 왜 아버지를 그리 욕하고 할머니는 왜 나에게 엄마 욕을 그렇게 했는지.


  내가 국민학교 2학년 때 둘은 이혼했었다.


  돌아온 엄마는 아빠의 술버릇과 책임감 없는 생활력 때문에 합가를 망설였다. 결국 우리들을 봐서 아빠와 재혼했지만, 혼인신고서를 제출하는 그 순간까지도 망설였다. 어쨌든 우리는 수년만에 아빠, 엄마가 다 있는 평범한 아이들이 됐다. 하지만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아버지의 술버릇은 다시 시작됐고, 결국 다시 이혼했다.


  이번에는 전과 달리 아버지와 어머니 둘 중에 누구를 따라갈 것인지 선택해야 했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의 일이니까 재혼하고 3년 만이다. 당연히 어머니를 선택했고,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됐다. 졸업하면서 바로 서울로 대학교를 갔고 군대에 가서 명절 때도 집에는 거의 안 왔다. 그렇게 어머니와 주소지를 같이 해놓고 산 지 6년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아버지의 결핍이 나의 무게로


  아버지의 시신을 보고 나오는데 둘째 이모가 어머니를, 내가 동생을 부축했다. 장례식장 담당 직원이 검은 양복 대여할 거냐고 물었는데 군복을 벗기 싫어서 대여 안 하겠다고 했다.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복무하고 있다는 것을 그 자리에 모여있는 집안 어른들 모두가 자랑스러워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장례식장에서 장손이자 맏아들이자 가장으로서 역할을 다했다.


  장례식 이틀째 오후쯤 손님이 없어 한가할 때 잠도 깰 겸 잠깐 바람 쐬러 밖에 나갔다. 아무도 없으니까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혹시 누가 볼까 봐 구석진 곳으로 가서 나오는 눈물을 삼켰다. 그때 막내 작은어머니가 나를 봤다. 못 본 척 지나가 줬다. 그 한 번 이후 장례가 끝날 때까지 잘 참았다. 장례가 끝나고 어른들은 나를 대견스러워했다. 어머니와 동생도 나에게 잘 버텨줘서 고맙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아버지 장례까지도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마음껏 슬퍼하지도 못했다. 사람들은 나를 책임감 강한 사람으로 봐줬다.      




나의 어두움을 직면하다


  이런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보호하는 일이었다. 본능적으로 '모든 것에 일정한 거리를 두는 방법'을 선택했다. 심지어 '나'에게서도. 내가 살아내고 있는 이 삶이 마치 드라마인, 영화, 소설인 것처럼 봤다. 내가 선택한 이 방법을 나조차도 40년이나 지난 뒤에 알게 됐다.


  공황장애를 치료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이 내 감각과 감정을 알아차리는 것이었다. 화가 나는지 슬픈지 기쁜지 맛있는지 없는지 기분 좋은지 나쁜지 바람이 시원한지 상쾌한지, 이 모든 감각과 감정들이 무뎌져 있었다. 군에서 부하들은 나에게 화를 한 번도 안내서 존경스럽다고 했다. 보험회사에서 선배들은 내가 부처님 같다고 했다. 나는 그런 말들을 처음에는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마인드컨트롤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조절을 잘하는 게 아니라, 못 느끼는 것이었다. 나도 모르는 나의 선택에 의한 결과물이다.


  자연스럽게 눈치를 봤고, 사회적으로는 책임감이라는 모습으로 표현됐다. 수준이 적절했다면 좋았을 텐데 책임감이 압박감, 강박증, 완벽주의, 타인의 부정적 반응을 두려워하는 마음, 죄책감으로까지 발전 돼버렸다. 그러니 사소한 것부터 중요한 것까지 어떤 선택을 해야 할 때면 눈치를 봤던 것이다. 


  눈치는 말 그대로의 눈치가 아니라 내가 '나를 보호해 줄 사람'이라고 인식한 이들에게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이었다. 그들의 부정적 평가를 두려워하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어떤 일이든 완벽하게 하고 싶었다. 그들이 싫어하는 행동이나 말,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했다. 말 한 번만 잘 못해도 죄책감이 느껴졌고, 그게 머릿속에서 수시간 혹은 수일 동안 나를 괴롭혔다. 이것들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한 것이 아니다. 다 내 머릿속에서 내가 나에게 한 것이었다.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누가 나에게 울지 마라고 한 적 없다. 마음껏 슬퍼하지 말라고 한 적도 없다. 눈물을 삼키라고 한 적도 없다. 내가 그렇게 했다.


  모든 일을 그만두겠다고 결정하고 나서 아내는 나에게 이렇게 말해 줬다.

  "그동안 열심히 살았고 고생 많이 했어. 잠깐 쉬는 동안 하고 싶은 것도 좀 하고 배우고 싶은 거 있으면 해 봐. 혹시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면 혼자 다녀와."

  이 말을 듣고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던 이유를 알게 됐다.


  내가 '나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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