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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민 Jun 27. 2023

부부관계, 이런 아내가 있어 참 다행이다

바보온달이 평강공주에게


  “뭐 저런 사람을 데려왔어!”

  아내와 사귈 때 부모님께 인사하러 갔다가 들은 말이다.




  사관학교에서 부적응자였다가 ‘그만두고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을 포기하고, 기왕 이렇게 된 거 성공하고 싶다는 대단한 각오로 첫 직장인 장교 생활을 시작했다. 포기할 것을 먼저 정하고 남은 걸 하나씩 선택해 나가는데 나는 ‘기왕’이라는 것을 선택했다.


  유명한 장군의 책이나 존경할 만한 군인이 등장하는 영화에서는 항상 동료나 부하를 위해 자신의 출세 따위 안중에 없는 사람들이 멋진 모습으로 묘사된다. 부하의 상처에서 나오는 고름을 입으로 빨아줬던 장군, 아군이 전부 다 포위된 지역에서 구출 헬기에 부하들을 다 태우고 나서 마지막에 발을 떼는 지휘관을 롤 모델로 삼았다.


  2010년경 SBS 다큐멘터리 중에 <출세 만세>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결론에서 출세라는 것의 정의를 말해준다.


  “오랫동안 준비한 사람이 세상의 부름을 받고 나와 만인을 위해 봉사의 길로 들어서는 것.”


  내가 오랫동안 준비하고 세상에 나온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제라도 철저하게 준비하고 세상의 부름에 응하자 생각했다. 그래서 한참 동안 이 정의를 가슴속에 품고 다녔다.


  그래서 가족이나 사생활은 없었다. 장교가 된 후로 명절 때도 집에 간 적이 거의 없었다. 다들 집에 가야 한다고 당직근무를 바꿔 달라면 나는 당연하게 바꿔줬다. 부대에서 집에 못 가는 병사들과 함께 생활해야 한다는 사명감이었다. 아니 사명감보다 ‘희생할 줄 아는’ 멋진 군인이 돼서 성공하려고 했다.      




  어느 날 후배가 소개팅을 시켜줬다. 그 후배는 신학대학을 다니다가 온 친구였고 정적인 ‘군 목사’보다는 빨리 갔다 올 수 있고 활달하게 생활할 수 있는 현장에서 일하는 장교를 선택했다고 했다. 일도 꽤 열심히 하고 잘했다. 그가 소개해 주는 사람이라면 ‘기왕’이라는 가치에 부합하는 여자일 거라 생각했다. 게다가 내 이상형인 ‘최강희’ 배우와 닮은 사람이라고 했다. 실제는 많이 달랐다.


  금요일 당직근무가 끝나고 다음 날 자야 할 시간에 약속을 잡았다. 그 시간 말고는 시간을 낼 수 없었다. 아니, 없다고 생각했다. 나의 성격을 아는 후배는 자기 여자친구와 함께 자리해서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우린 첫 만남부터 대화가 잘 통했다. 만난 지 얼마 안 돼 결혼을 전제로 사귀자는 말을 선선히 승낙했고 진도가 빠르게 나갔다. 곧 결혼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 내 모습에 후배는 만족스러워하면서 남은 군 생활을 즐겁게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내를 데리고 나온 후배의 여자친구도 내 여자친구에게 심하게 갈굼을 당해서 기분 풀어주려고 소개팅을 주선한 거였다고 했다.     


  사귀기 시작하고 3개월 정도 지나서 먼저 여자친구의 부모님께 경주에 있는 집으로 인사드리러 갔다. 청주에 사는 그녀의 언니도 내려왔고 부모님, 할머니가 계셨다. 집에서 식사 한 끼 하면서 가볍게 대화했고 분위기 좋게 잘 끝났다. 그리고 그다음 주에 휴가를 내고 전라도의 우리 집으로 인사를 갔다. 인사를 가는 차 안에서 여자친구가 언니의 말을 전했다.     


  “뭐 저런 사람을 데려왔어!”

  “……”     


  말이 안 나왔다. 내가 인사 끝나고 돌아가고 나서 말이 나왔고 어머니도 동의하셨다고 했다.      


  “인사 오는데 청바지 입고 오고 스니커즈 신고 오는 사람이 어딨냐? 아무리 군인이라 옷이 없다고 해도 인사하러 오는데 정장 한 벌 사서 입고 올 정도 예의는 있어야지.”     


  난 항변했다. 당시 입고 갔던 옷과 신발은 모두 인사드리러 가기 위해 새로 산 것이다. ‘기왕’이라는 가치관에 맞게 살다 보니 군복과 체육복 외에는 옷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살 수밖에 없었다. 다만 20대를 군에서 지나온 나에게 정장은 익숙하지도 않았고 ‘어떻게 입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최대한 정장과 비슷하게 재킷과 검은 청바지 세트를 샀고 어울리는 구두같이 생긴 검은색 스니커즈를 준비했다. 구두는 왠지 나랑 안 어울리는 것 같았다. 근데 그 스니커즈가 흐물흐물해서 한 번에 신을 수가 없다는 생각까진 못 했다. 어쨌든 난 최선을 다해서 준비한 것이었노라고 말했다.


  여자친구는 잘 설명하고 넘겼다고 말하면서 웃기만 했고, 결국 같이 가서 내 인생 첫 번째 제대로 된 정장과 구두를 샀다.




  결혼하자마자 우리는 경주에서 강원도로 이사 갔다. 아내가 된 여자친구는 30년을 살면서도 한 번도 집 떠나서 살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나와 결혼했다는 이유로 결혼식 하자마자 직장도 그만두고 연고 하나 없는, 수학여행 때나 가봤던 강원도 설악산 밑에서 살게 됐다. 그럼에도 나는 ‘기왕’을 끝까지 준수하기 위해 아내를 집에 혼자 두는 시간이 많았다.


  첫째 아이를 낳고 갓난아이일 때 강원도 속초에 사람 키보다 높게 쌓일 정도의 폭설이 내렸다. 뉴스에 검색해 보면 지금도 나올 거다. 나는 부대에서 2주가량을 대기했고 아내는 혼자서 아이를 돌보면서 집 앞을 막은 눈을 파냈다. 둘째가 나왔을 때는 산불이 나서 1주일간 집에 못 들어갔고 아이 둘을 혼자 돌봤다. 폭설이나 산불이 아니더라도 진급 심사에 들어갈 시기에, 그 시기에 맞는 바쁜 자리에서 일하고 있었기에 부대에서 사는 날이 훨씬 많았다. 153cm밖에 안 되는 작은 키의 여자 혼자 아이 둘을 키우고 집에서는 잠만 자고 나가는 신랑 밥과 빨래를 해댔다.


  지금도 딸들과 거의 매일 통화를 하는 장인어른은 말 수도 없고 전화도 잘 안 하는 하나뿐인 사위에게 실망하면서 딸을 혼냈다. 그거 때문에 우리도 많이 싸웠다.


  "아빠한테 전화 한 통 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

  "난 전화 한 번 하려면 몇 날 며칠 고민해서 시나리오 쓰는 정도로 준비해야 된단 말이야. 그래서 우리 엄마한테도 전화 잘 안 하는데 그게 쉽겠냐?"

 

  그래 놓고도 장인어른에게 '이 사람 성격이 그런 걸 어떻게 하냐'라고 이해해 주라고 10년 넘게 설득하고 있다. 어떨 때는 남편을 위해 아빠를 오히려 혼내기도 한다. 사위도 아들인데 아빠가 직접 전화하고 이야기해서 교육시키라고. 그럴 거 아니면 있는 그대로 이해해 주라고.

  다행히 아내의 10년 간의 수고가 있었고, 귀여운 손주들이 사위의 자리를 잘 메워주고 있어서 지금은 괜찮아졌다.  


 


  앞으로 어떻게 살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 있었다. 뭘 할 줄 아는지, 뭘 해왔는지 전부 다 적어봤다.


  경영대학원 졸업, 홀랜드 직업상담사 과정 수료, NEO 성격검사 교육 수료, MBTI 초급 자격과정 수료, MBTI 글로벌 코칭 수료, 사주팔자 공부, 복싱, 헬스 개인 PT, 바리스타 2급, 만년필 수집, 연필 수집, 심리/역사 분야 책 사 모으기와 독서, 블로그마케팅 배우기, 토익 학원, 보험영업과 중소기업 컨설팅, 노동법 강의, 그 외 다수.


  ‘기왕’이라는 가치관으로 살아왔다고 하기에 생각보다 다방면의 많은 걸 했다. 어떻게 보면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았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 이 모든 것 중에 책 사 모으기만 빼면 다 결혼하고 나서 한 거다. 그때그때 ‘기왕’에 지쳐서 힘들어할 때 아내가 추천하거나 해보라고 응원해 줘서 용기 낼 수 있었던 일들이다.


  그리고 지금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있는 ‘직업상담사’도 아내의 권유다.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것과 성격, 적성을 고려하면 잘 어울린다고 했다. 나도 아직 해보지는 않았지만, 재미있고 보람도 느끼고 의미도 찾을 수 있는 일이 될 것 같았다. 아내 덕에 생각도 못 하고 있던 새로운 길을 발견하고 힘들었던 마음이 많이 안정됐다.     




  지금껏 어릴 때 상처에 갇혀서 내가 제일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이런 나를 지켜보고 옆을 지켜줬던 여자는 쑥과 마늘을 얼마나 먹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웅녀도 쑥과 마늘을 100일만 먹고 사람이 됐는데 아내는 10년 넘게 먹고 있다.


  그러면서도 정장 입을 줄도 모르는 사람한테 정장 입고 구두 신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바보온달을 장군으로 만들어 낸 평강공주처럼.      




  나에게 이런 아내가 있어서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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