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급(승진)은 누구를, 무엇을 위한 것인가?
진급은 사회적 성공을 위한 것이 아니다.
진급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전역하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서 이력서를 써봤다. 대학 졸업하자마자 장교 생활을 시작했고 군에서의 성공과 진급만을 위해서 살아왔다.
대충 살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못하는 인간관계도 잘해보려고 술자리도 빼지 않고 다 참석했다. 대학 때 주량이 소주 2잔이었던 내가, 수 없는 구토로 단련해서 주량 한 병 반까지 늘렸다.
근데 이력서에는 한 줄도 쓸 게 없다. 쓸 수 있는 것이라고는 군대 경력, 군에서 했던 일밖에 없다.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건 누구나 있는 토익점수, 경영대학원 졸업장 정도뿐이다.
군에서 했던 일도 최대한 연관성 있어 보이게 포장해서 이력서를 썼고 온라인 취업 사이트에 올려봤다. 보험회사만 열 군데 넘게 연락 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연락도 다 보험회사 본사가 아니라 보험설계사들이 영업 전화를 한 거였다.
전역하겠다고 몇몇 선배한테 조언을 구한다고 연락했더니 다 똑같은 말을 했다.
"네가 왜 진급이 안 됐냐, 너는 될 줄 알았는데, 왜 벌써 포기하냐, 다른 방법을 찾아봐라, 같은 것들이다."
하기야 나보다 한참을 더 살았던 선배들이라고 해도 군 생활만 20년, 30년 했던 분들인데 뭐라 조언해 주겠나. 그들도 동기나 선배들한테 들은 말을 할 뿐이고 책에서 본 좋은 문구를 말할 뿐이다.
전역한 선배들은 내가 가상으로 이력서를 써서 올려봤던 걸 실전적으로 경험했을 것이다. 똑같은 결과를 얻었을 것이다. 그러니 해 줄 수 있는 말이라고는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라는 말이다.
직장인에게 진급이나 승진이 최고의 보상임은 확실하다. 근데 그 보상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적어도 나를 위한 건 아닌 것 같다.
군에 들어가서 처음 계급장을 달고 진급했을 때 세상 모든 것을 이룬 것처럼 좋았다. 그런데 진급에 실패하고 전역하려고 보니까 ‘진급한 결과에 따라 주어진 계급, 직급’이 ‘내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성공해 보겠다고 열심히 살았고, 살다 보니 진급이라는 걸 해야 했다. 그래야 내가 조직 내에 계속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10년 넘는 세월 동안 그걸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 과정 중에 하나씩 하나씩 이룰 때마다 보람도 느끼고 인정도 받았고 그만큼 축하해 주니까 좋았다.
올라간 직급, 계급만큼이나 따르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할 수 있는 일도 많아지니까 그 맛에 취하기도 한다. 하다못해 회식 자리에서 가만히 앉아 있어도 챙김을 받는 기분을 느끼기도 한다. 지나고 보니 그게 다 내 것이 아니었다.
진급의 의미는 사회적 성공이 아니다.
첫 진급에 떨어지고 아무도 없는 집에 왔을 때 세상과 완벽히 분리돼서 혼자가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전역하고 다시 사회생활을 시작한 몇 년 후까지도 같은 마음이었다.
빨리 뭔가를 해야 한다, 이뤄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다. 장교가 된 후로 사회적 영향력, 출세 같은 것으로 주변에 인정받으려고 했다. 그러려면 진급을 반드시 해야 했다. 더 철저하게 준비하고 계획하고 실행했지만 실패했다.
전역한 후에도 장교였을 때 가졌던 영향력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상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돈을 월등하게 많이 벌어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완전한 전역도 되기 전, 전직 지원 기간부터 보험회사로 출근했다. 그래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를 인정할 것이고, 떠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떨어져 혼자가 됐을 때의 외로움이 다시 떠올랐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처음부터 진급해서 높은 직급을 갖고 영향력을 갖게 되는 삶을 원한 게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사관학교에서 인생 최악의 성적을 받을 정도로 적응도 못 했지만 장교가 됐던 이유는 어머니의 인정이었다. 나를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장교가 된 후로 가족 전체가 나를 집안의 자랑으로 여겼다. 진급하고자 했던 것도 군 안에서의 성공을 위한 것보다 가족한테 인정받고 그들이 내 곁을 떠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결국 난 외로움이라는 결핍을 진급으로 채우고자 했다. 그게 무너지고, 세상에 홀로 남겨진 두려움을 느꼈다.
진급의 실패는 내가 사회적 성공에 실패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홀로 버려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