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함과 부당함, 그 사이 어딘가

머리로는 저도 알거든요? 몸이 먼저 반응하는데...

by 오월

나는 대나무 같은 사람이다.

무언가 부당하다고 느끼면 빈말로라도 '죄송하다'는 말을 꺼내지 못한다. 머리로는 나의 입에 발린 사과라도 해야 끝이 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죄송하다고 말하는 순간 나의 잘못으로 인정하는 것만 같아서. 막무가내 기분 상해죄에는 절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지 않는다.

어쩌면 오지랖은 넓고 심성이 배배 꼬인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가끔 환자보다 더욱 예민한 보호자를 마주할 때가 있다.

사람 볼 줄 모른다는 말을 종종 듣지만 그 손님만큼은 쎄한 느낌이 딱 들어맞았다. 은은하게 돌아있는 안광이라 해야 하나?

번뜩이는 안광을 가진 보호자님은 자주 방문하지는 않았지만 올 때마다 기분 좋게 있다가도 결제할 때 트집을 잡았다.

"뭔데 우리 엄마를 계속 불러요?!"

"저 현금영수증 발행한 적 없는데 무슨 소리예요?! 봐요, 그 번호 없잖아요!"

"무슨 이렇게 싸가지가 없어??!"

매번 올 때마다 나에게 시비를 걸지 못해 안달이 나 있었다. 아마 맨 처음 나와의 트러블이 있었을 당시, 약사님이 환자분을 불러 문의하던 상황을 내가 환자분을 곤란하게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보호자님은 그 이후로 방문할 때마다 내게 시비를 걸지 못해 안달 나 있었고 밑도 끝도 없이 싸가지 없네, 무슨 이딴 직원이 있냐, 당장 사과 안 하냐, 매장이 떠나가도록 난동을 부렸다.

잘못이 있었다면 사과를 드렸겠지만, 애초에 내가 입을 열면 '싸가지 없네'를 시전 하는 보호자에게 더 이상 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고, 꼿꼿하게 설설 기지 않는 모습은 보호자를 열받게 하기엔 충분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나를 도와주는 이는 없었다.

워낙 난동을 부려서 엄두를 못 내는 것도 있었지만, 해당 상황을 무마하려 무작정 '손님께 사과드려'라고 압박하는 약사님도 꼴도 보기 싫었다.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욕을 먹고 있는 건데..!

애당초 보호자님은 시시비비를 가리고 싶은 마음 따위 없었다. 고객이 왕이라는 것을 몸소 느끼게 해 줄 직원의 사과를 받고 싶었던 것이지만 나의 꼿꼿한 성질머리는 그걸 도와주지 않았다.



대학병원 문전 약국에서 근무하니 별의별 손님을 만난다.

산재는 한참 전에 발생했지만 전혀 상관없는 진료과, 원래 비급여 약이지만 보험처리로 가져오는 손님은 내가 만났던 손님 중 단연코 최고였다고 말하고 싶다. (반어법이다)

산재 환자의 경우, 단순히 약국과 병원 사이에서 일처리를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산재로 등록된 곳이 안과라면 안과만 혜택을 받아야 하지만 그 손님은 다른 진료과 약을 산재로 받아오셨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문의 전화를 여러 번 돌린 끝에 도달한 결과는

"그분 도대체 말이 안 통하셔요... 그냥 그렇게 해주세요;;"

냅다 전화로 '해줘'를 요구하는 막무가내 손님이기에 어쩔 수 없이 원하는 대로 처리해 주었다는 것이다. 법적으로 정해진 것조차 허용되도록 만든 진상 손님에게 혀를 내둘렀다.

서류상 허용되도록 만들었기에 약국에서는 문제 될 것이 없었지만 나의 배배 꼬인 성질머리는 속에서 열불이 났다.

말 잘 듣는 손님은 혜택을 보지 못하고, 꼭 패악질 부리는 손님이 혜택을 받는다. 이미 위에서 정해진 건이라 내가 나서서 무언가 할 필요는 없지만 부당함에 열불이 난다.



타인에 비해 부당함에 대한 예민도가 높다.

생각해 보면 이것 또한 나의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나의 잘못이 아님에도 여자라는 이유로 할머니에게는 혼이 났다.

남동생에게 오냐오냐 하던 할머니는 동생이 나와 놀다가 울면 내게 '애기 왜 울리냐!!' 하고 나를 혼냈고, 그저 함께 게임하다가 본인이 지는 상황에 분을 못 이겨 울음을 터뜨린 것임에도 그것은 나의 잘못이 되었다. 나도 억울함에 할머니께 따지면 할머니는 아빠에게 고스란히 나의 행동을 일러바쳤다. 진실에 과장을 보탠 것은 나를 못된 아이로 만들었다.

아빠는 소식을 듣고 매를 들었다. 억울함과 분노로 뒤엉킨 마음으로 매 맞은 엉덩이는 나의 마음처럼 핏줄이 다 터져 보랏빛과 붉은빛이 얼룩덜룩 해졌다. 그때도 입을 꾹 닫고 잘못했다, 죄송하다는 말은 내뱉지 않았다.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진짜 나의 잘못으로 확정될 것만 같아서.


누군가는 나의 이런 모습을 보고 '답답하게 왜 그러냐, 그냥 죄송하다 말로만 끝내면 될 것을' 하면서 잘못한 손님이 아닌 나를 욕한다.

안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어린 시절 나의 분노는 아직 그 시절에 머물러 있는데 어쩌겠는가.

사람들은 본인의 기준으로 타인을 쉽게 평가한다. 각자에게 예민한 부분이 있을 테고, 아직 떨쳐내지 못한 무언가가 남아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쉽게 그 사실을 잊어버리곤 한다.

나도 머리로는 알고 있다. 편안함과 부당함, 그 사이에 불편한 감정이 위태롭게 줄타기를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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