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의 고장, 그리고 전통 음식들
맥주가 물보다 싸다는 수식어가 붙는 나라, 우리도 물 대신 맥주를 마셨다.
물 값이 비싼 건지, 맥주가 싼 건지 아무튼 프라하를 말할 때 맥주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예로부터 맥주는 유럽에서도 프랑스 북쪽,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를 비롯해 중부 내륙의 체코, 헝가리 등 추운 지방에서 즐겨 마시던 전통 음료다. 그 가장 큰 이유로써, 맥주 양조의 원료인 몰트(Malt, 맥아)가 되는 보리를 비롯한 주 곡물들이 대체로 이 지방에서 재배, 생산된다. 따라서 예부터 전해져 오던 양조법은 오늘날 그 전통을 자랑하는 유명한 맥주의 본고장이 되었다.
필스널 우르켈(pilsner urquell), 코젤(kozel) 등 대량 생산되는 체코산 맥주가 맛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내가 지금껏 마신 맥주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며 잊지 못할 최고의 맛은 단연 프라하의 피보바르(pivovar, 소규모 양조장을 겸하며 맥주와 음식을 파는 곳) 스트라호프(Strahov)에서 마신 맥주다.
이 집은 프라하 성 광장에서 위쪽으로 계속 가면 스트라호프 수도원이 나오는데, 그 수도원 건너편에 있다. 여기서 파는 맥주는 일반 대량 생산 제품이 아니라 소규모로 자체 제조한다.(사실 프라하에서는 맥주의 고장답게 소규모 수제로 양조해서 파는 피보바르가 많다)
우리는 끼니때를 살짝 넘겨 이리저리 음식점을 찾다가 이 집 분위기에 이끌려 들어갔다. 번잡한 중심가에서 약간 벗어나 있어 호젓한 가운데 고풍스러운 멋이 느껴졌다. 그러나 손님은 적잖이 많았다. 어쩜 우리만 몰랐지 이미 널리 잘 알려진 곳인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맥주 맛이 일품이다. 내가 마신 맥주는 매우 독특한 과일 향이 나면서 순하고도 부드럽고, 남편이 마신 맥주 또한 특별했다. 혹시 배도 고프고 갈증도 나던 참에 '시장이 반찬이다' 식으로 느낀 착오였나 싶어 다음날 그 맛을 확인하고자 다시 찾았다. 역시나 훌륭했다. 음식 맛도 좋았다.
우리는 세 종류를 번갈아 주문해서 음미하며 먹었다. 이왕 발동한 호기심에 흑맥주 맛도 보고 싶었으나 벌써 동이 났었고, 위장도 더 이상은 허락하지 않았다. (문득 맥주를 좋아하는 서울 사는 친구 생각이 나면서 이 자리에 없음이 아쉬웠다.) 그리고 우리 옆 좌석에서 바이킹 후예들이 마시는 량에 압도당하여 그만 일어서 나왔다.
사전에 아무런 정보도 없이 우리의 직감에 맡기고 들른 집이 의외의 멋진 결과를 안겨주었다. 이럴 때 여행의 진 맛을 느낀다. 고수라는 착각을 하면서...
나는 강한 호기심에 종업원에게 그 과일향의 주원료를 물어보았다. 그는 사진까지 찾아 보여 주면서 발효과정을 상세히 설명해 주었지만 아리숭, 그 명칭조차 체코어라 오리무중이다.
나는 이 맥주 맛을 언제까지나 잊지 못할 것이며, 익히 프라하와 더불어 내 추억의 한 페이지로 기록될 것임을 감지했다.
맛도 좋고 싼 맥주의 나라답게 젊은이들에게는 천국 같은 프라하다. 젊은 관광객이 많기도 하지만 밤이면 피보바르마다 젊은이들로 꽉 찬다.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도 유사한 풍경이었지만, 우리에게는 부다페스트에서 마신 맥주보다 독일, 암스테르담에서 마신 것보다도 체코의 맥주가 훨씬 더 맛있었다. 물론 내가 맥주 애주가도, 전문가도 아니고, 모든 양조장 맥주를 다 마셔보지 않았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따라서 지극히 주관적 견해로써 남편과 내가 마신 것 중에서는 으뜸이다.
다음으로 맥주와 잘 어울리는 음식 또한 빼놓을 수가 없을 것이다. 추운 지방 특유의 채소보다는 소, 돼지고기가 주 요리다. 돼지고기 전통음식으로는 후추, 마늘, 맥주가 첨가된 양념소스에다 돼지 갈빗살과 정강이 부분을 푹 절인 다음 그릴에서 구운 것이다. 우리의 양념갈비 또는 족발과 비슷한 맛이었다. 맛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흔히 먹는 돈가스와 독일처럼 햄, 소시지 등도 많다.
소고기 요리로써 굴라쉬라는 전통음식은 양파, 당근 등과 함께 푹 고은 연한 소고기 스튜 같은데, 빵과 곁들어 나온다. 이 빵이 내 어린 시절 먹었던 발효 술에 반죽한, 꼭 옛날식 찐빵 같은 맛이었다. 그래서인지 내 입맛에는 잘 맞았다.
유명 관광 도시답게 시내 곳곳에 개성 있는 다양한 음식점들도 많으며, 베트남, 인도, 한국 식당도 제법 눈에 띄었다. 강이나 수로, 물이 흐르는, 또는 안마당을 낀 옛 건물 등의 분위기와 낭만적 멋이 있어 살면서 한 번씩 들러 보고 싶은 카페, 레스토랑들이 처처에 있다.
현지인이나 젊은 층들이 많이 찾는 말 그대로 로컬(lokal)이라는 체인 음식점도 곳곳에 있지만, 가격은 다른 음식점과 별반 차이 나지 않았다. 그 외 내가 모르는 다양한 요리들도 많을 것이다. 설렁 안다 하더라도 여기서 다 언급할 수도 없다.
이처럼 전통음식이란 그 나라마다의 기후나 지형에 따른 독특한 연계성을 지니고 있으며, 예부터 조상들이 즐겨 먹던 것으로써, 삶을 유지하는 양분이며, 따라서 그들의 삶과 문화적 특성까지도 잘 드러내는 삼위일체의 조화다.
체코, 중앙 유럽의, 내륙, 크지 않는 땅, 그리하여 생선보다는 고기음식이 많았고, 양고기보다는 돼지고기가 주였다. 추운 지방이라 그런지 푸른 야채보다는 감자, 당근, 양배추 종류가 많았으며, 크램브리 열매도 비근하게 보였다. 호밀빵을 비롯한 다양한 빵들이 있으며, 마, 양귀비, 해바라기 씨앗등이 주로 곁들여져 있다. 무엇보다 프라하 음식들이 맥주와 서로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이토록 나라마다 자연에 순응하며 살았던 조상들의 삶의 지혜를 전통음식을 통해서도 엿볼 수가 있다. 이 앎 또한 여행이 주는 깊은 맛이 아닐까?
도착 첫날, 예약한 아파트 숙소에다 가방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본격적인 여행이 아니라, 전조 전, 대충 밑그림을 그려보는 기분이랄까?
우선 프라하의 심장이며, 주요 명소이기도 한, 관광객들에게 가장 핫한 천문 시계탑과 성 니콜라스 대성당, 틴 노트르담(Notre-Dame du Tyn) 고딕 성당이 있는 유명한 구시가지 광장과 까를교 위를 천천히, 가볍게 걸었다. 한데 아침부터 서둘은 여정 탓인지, 비행기 안에서 먹었던 점심이 약해서인지, 갑자기 위장이 허줄해져 왔다. 이 아름다운 까를교 위에서 배 고픔은 나의 체면을 마구 구겨 놓았다. 그토록 기다렸던 까를교가 제대로 보이지가 않는 것이다. 어쩜 너무 많은 인파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많은 사람들이 손에 들고 다니며 먹고 있는 롤 빵이 더 궁금하고 관심 있게 눈에 들어왔다. 그때 마침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 그 롤 빵집이 눈에 띄었다. 남편에게 먹어 보자고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 프라하 전통 빵은 이곳을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사 먹었을 법한, 관광객이 지나는 길목 처처에서 유혹을 한다. 너무 많다.
뜨르들로(trdlo)라는 이 빵은 밀가루 반죽을 돌돌 말아서 가운데 철 막대기를 끼워 숯불 위에서 돌려가며 굽는다. 그러면 가운데가 빈, 구운 빵이 된다. 표면에 설탕가루를 묻히고 중앙의 빈 곳에는 각종 아이스크림이나 과일 잼 같은 원하는 종류를 넣어서 준다. 물론 첨가된 종류에 따라 가격도 다르다.
우리는 계피향 나는 사과 잼이 든 빵을 샀다. 어찌나 맛있는지 다 먹고도 딱 한입이 부족한 게 자꾸만 미련이 남았다. 그래서 다음날 똑같은 것을 하나 더 사 먹었다. 아쉽게도 어제의 그 맛이 아니었다. 물론 빵이 식어 그 깊은 맛이 떨어진 것일 수도 있겠으나, 그야말로 '시장이 반찬'이었다. 그렇다고 결코 맛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빵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후식 또는 커피나 차와 함께 먹는 빵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여행은 때때로 많은 에너지를 요구한다. 많이 걷고 돌아다니다 보면 쉽게 허기가 진다. 이럴 때 잠깐 앉아서 차나 커피 한잔과 먹는 케이크 빵은 지친 육체에 활기를 불어넣어 지속적인 여정을 이어가게 만드는 마법 같은 역할을 한다.
프라하에서 가장 맛있었던 케이크는 현대 미술관 실내 카페에서 먹은 커피와 케이크다. 가격까지 저렴해서 더욱 인상에 남는다. 그리고 블타바 강 왼쪽 말라 스트라나(Mala Strana) 구역의 강변 공원에 있는 커피점 케이크는 그 맛이 너무 섬세하고 부드러우며,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세련된 맛이라 깊은 맛이 덜 느껴졌다. 하지만, 가격이 비싸서 또한 기억에 남는다.
내가 아는 바로는 프랑스와 달리 계핏가루를 많이 사용한다는 점이다. 프랑스에서는 흔치 않다. 그런데 프라하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계피향 케이크가 많았다. 너무 달지 않아 좋았다.
이 정도에서 음식 이야기를 끝내고, 소화도 시킬 겸, 또는 산책하는 기분으로 잠깐 관심도를 옮겨 보자.
프라하에 사는 현지인이 아닌, 여행객으로써 쉽게 놓치거나 주목하지도, 주의 깊게 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소홀히 여길 수 있는, 아니면 적어도 내가 흥미를 가졌듯이, 누군가도 의문을 가졌을 법한 두 가지 예를 든다면, 그 하나는 프라하 건물 입구 벽에 붙은 빨강과 파란색 두 가지의 번지 숫자다.
이 빨간 번호는 세금과 관계된 숫자라고 한다. 두 번째는 옛 건물마다의 대문 위에 조각된 문양들이다. 오늘날 집집마다 번지수가 있듯이 그 시절에는 문양으로 가구마다를 구분 짓거나 지칭하는 방법이었다고 한다. 사자, 전갈, 백조 등의 다양한 문양들, 우아함, 이 얼마나 운치 있게 뛰어난 옛사람들의 상징성인가? 품격 있는 그들의 문화적 발상이 아니던가?
우리는 각 집마다의 문양들을 보면서 하나하나 재미있게 눈에 찍어, 읊어가며 걸었다. 그 문양의 속성에 따라 그 댁이 가진 취향이나 문화를 가름해 보기도, 웃고 농 삼아 즐겼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