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푸투나 섬
그곳에는 내가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세계가 있었다.
강렬한 자연의 힘이 흐르고 있었다.
폴 고갱이 타이티 섬을 떠나서 보다 더 원시적인 정취를 찾아 간 마키즈(îles Marquises) 섬처럼 우리가 왈리스를 떠나 푸투나섬에 닿았을 때가 꼭 그랬었다.
원시와 문명이 충돌하는 곳.
기이한 별세계 같았다.
프랑스에서 총 26시간여 비행과 꼬박 이틀 동안의 노정 끝에 도착한 곳은 편편한 산호섬 왈리스보다 더 작고 거친 고유한 성격을 가진 땅, 아직도 이 섬에는 문명이 닿지 않은 것 같았다.
푸투나는 표면적 46,28km의 먼 태곳적 남태평양 한가운데서 솟아 오른 화산으로 해발 524미터 푸케 산(mont Puke)을 형성하여 생긴 섬이다. 이 화산섬은 마치 지도상에서 실수로 찍어 놓은 듯 잘 보이지 않는 하나의 작은 점에 불과하다. 바닷가 띠처럼 둘러쳐 있는 유일한 도로를 중심으로 치받이따라 전통 초가집과 함석지붕을 이은 현대 가옥들이 옹기종기 뒤섞여 있다.
폴리네시아 원주민과 파파라니(프랑스 본국에서 유입된 사람을 일컬음)를 포함한 4000명 남짓 구성된 인구가 동쪽으로 알로(Alo), 서쪽은 싱가베(Sigave)라는 두 왕국의 전통관습과 프랑스 해외 법령에 따른 섬이다.
우리가 탄 소형 비행기가 안착하자 공항 경계선 철조망에 올라 붙은 호기심 어린 원주민 아이들 눈동자가 우리를 먼저 환영했다.
우리는 안과 밖이 달리 구별 없는 공항에서 물론 짐을 찾아 나왔지만 도통 어디가 어딘지를 모르겠고, 버스도 택시 또한 없어 정류장은 당연히 없으니 어떻게 어디로 향해 가야 할지 몰라 흡사 시골에서 상경한 사람처럼 어리벙벙 망설이고 있었다. 그렇게 우물쭈물 거리는 동안에 같은 비행기를 타고 온 사람들도 하나 둘 떠나가자 썰렁하니 하잘것없는 촌교에서 거의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데, 누군가 우리에게 다가와 친절을 베풀었다.
우리와 비슷한 연배의 이 파파라니 부부는 본국에서 보낸 우리 이삿짐을 같은 선박 한 컨테이너에 나뉘어 실었던 관계로 얼굴은 본 적 없지만 여러 번 메일을 주고받은 적 있어 서로가 추측으로 금방 상대편을 짐작케 했다.
이렇게 우리는 한 좁은 사회에서 작은 구성원의 일원이 되었다.
이 우연하게 만난 새로운 동료가 선뜻 태워주겠다는 반가운 제안에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얼떨결 그들의 자동차에 몸을 실어 중심지 호텔로 안내해 줄 것을 부탁했다.
해외령 거주 경력 많은 이 새로운 동료 부부는 무경험에 첫발 띤 우리와는 천지차이로 정착하는데 별다른 장애없이 철저한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 중고 랜드로버 지프차를 비롯하여 살 집도 프랑스에서 출발 전 이미 마련해 둔 상태였다. 우리는 정식으로 서로의 통성명을 나누고 간단하게 그동안 안부와 이런저런 사정을 나누며 촌길을 내달렸다.
열린 창문으로 가느다란 바람 따라 실려오는 바닷냄새와 더불어 이 생생한 공기를 맡음으로써 비로소 내가 프랑스도 아니고 한국도 아닌 먼 지구 동쪽 생소한 땅에 와 있음을 알았다.
그렇게 5분가량 달리자 금세 내 눈에 들어오는 기이하고 묘한 별천지 풍경이 펼쳐 지나가고 있었다.
바닷가 길 마을 어귀에 하얗게 깔려있는 죽은 산호들이 태양빛 아래 어찌나 하야 말갛도록 시린지 빛에 발한 거울보다 더 맹렬한 공격으로, 히말라야 눈보다도 더 희고 눈부시어 내 눈을 비수처럼 찌르고 있었다. 그는 내 가볍게 감은 눈썹 틈 사이를 힘차게 밀면서 열렬히 비집고 들어왔다. 그렇게 환한 모습 뒤로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의아스러운 장면이 내 온 감각을 집중시켰다.
마누(manou, 엉덩이를 두르는 천)를 감싼 부분만 제외하고 온통 흙보다도 더 짙은 색 원주민 남성들이 바닥에 쪼그려 앉아 무심한 표정으로 지나가는 이방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명랑한 흰빛 죽은 산호에 대비되어 다가오는 광경은 가위 내가 세상 밖 또 다른 세상에 와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뒤에는 반바지만 걸친 아이들 역시나 맨발로 흙먼지를 덮어쓴 모습이 오히려 희끄무레 짙은 밤톨같이 뛰어다니고 그 후경에서 짚으로 이은 초가집들이 어둡게 옹기옹기 촌락을 이루고 있었다.
이것은 마치 폴 고갱이 타이티 섬과 마키즈 섬에서 그렸던 그림에서나 봄직한 경관인데 지금으로부터 백 년이 넘은 광음 저 편의 경치가 실제 바로 내 눈앞에서 스치고 있었다.
순간 나는 내가 살아온 연화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돌연 되돌아온 것 같은 어느 세계에 와 있음을 직감했다.
따라서 전혀 상상조차 못 했던 이 경치는 비록 짧으나마 강렬한 인상으로 나에게 깊고 또렷이 새겨졌다.
달리는 자동차 너머에서 불과시 스쳐간 몇 분간의 이런 기이한 정경을 보고선 나는 이 원초적 모습에 매료되어 느닷없이 '멋지다. 잘 왔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우리는 중심가 싱가베 왕국의 피아 피아 호텔 (hotel Fia-fia) 앞에 내려서 숙소를 잡았다. 손님이라고는 우리 둘 뿐이라 마치 이층을 독채로 세 든 것 같았다.
호텔 주인장은 프랑스 기동헌병으로 푸투나 섬에서 은퇴한 파파라니 이다. 그는 토착민 여성과 결혼하여 이 섬에 정착했다고 한다. 마당에 우뚝 세워져 있는 모터보트 배를 타고 취미 삼아 가끔씩 바다로 나가 생선을 잡아 손님들 식탁에 올리기도 한단다. 그날 우리의 늦은 점심 식사에도 물론 그가 잡았다는 생선이 올려져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어리벙벙 분방하고 정신없이 첫날밤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