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마지막 종착지

1. 푸투나 섬

by 다나 김선자



새파란 하늘에 하얀 뭉게구름 둥실둥실, 찬란하게 눈부신 햇살 아래 잉크를 막 쏟아놓은 듯 빙석같이 투명한 검푸른 바다가 있었다. 활기차게도 푸르고 빛나는 열대림과 내 눈을 찌를 듯이 시리게 파고드는 죽은 흰빛 산호들과 갯벌 같은 피부 위로 알록달록 꽃무늬 마누(manou, 폴리네시아 사람들이 치마처럼 두르는 천)가 너울거렸다.

이 상쾌함, 들뜬 마음으로 고무된 기분까지 활짝 여물어 주는 싱싱한 바람이 스친다. 해맑은 대기 속에서 시큼 들큼한 땀내와 관능적인 진홍색 과일향, 티아레 꽃 우아한 향기가 뒤섞여 끈적끈적 엉겨 붙는 비릿한 이 냄새. 시원적 자연의 내음이다.

이것은 내가 지구 반 바퀴를 돌아서 원초의 땅 남태평양 폴리네시아 왈리스 푸투나 섬에서 가진 첫인상들이다.


몇 달의 기다림 끝에 준비한 많지 않은 세간을 다섯 개 철제 트렁크에 담아서 자동차 대신 스즈키 중고 오토바이 한 대와 나를 위한 자전거, 공기 주입식 보트 그리고 우리 미술작업에 필요한 재료들로 꾸려진 이삿짐을 서둘러 배편으로 보냈다.

그홀레 집 안팎 문을 꼭꼭 닫아걸고 그렇게 우리는 메트로 폴리탄과의 작별을 고했다.


긴 이별을 앞둔 늙으신 시어른들 아쉬워하는 마음이 저리고 밟혔지만 아무렇지 않은 양 의미심장하게 얕은 웃음으로 억지 평정 보이며 떠나왔다. 꼭 20여 년 전 겨울 끝자락에서 내가 파리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건강하지도 못한 연로하신 어머니를 가족 곁에 남겨두고 담대하게 엷은 미소 띠며 고향땅을 등진채 떠나 올 때처럼.

그 어떠한 것도 우리의 부푼 미래의 모험 앞에서는 이토록 무능력하게 주저앉았다.


프랑스 호와시(Roissy, 샤를 드 골 공항을 다르게 부름)를 출발한 에어 프랑스 비행기에 몸을 싣고 떠난 지 12시간여 만에 우리는 도쿄 나리타 공항에 내렸다. 미지의 땅으로 가는 긴 여정 위에서 환승을 위해 잠깐 머문 공항에서 조차 이 격앙되고 설레는 감정, 나는 너무 티가 날까 애써 억누르며 머뭇머뭇 곁눈 짓으로 일행을 찾는 척하기도 했다.

그토록 우리의 고조된 기분은 쉽게 꺼지지를 않았다.

달 떤 마음도 진정시킬 겸 면세점에서 비싸지 않은 내 손목시계를 구입한 후 환승 비행기를 타고(같은 비행기였는지는 기억이 안 남) 망망대해 태평양 상공을 날아서 지구 반대편 뉴 칼리도니아 톤투타(Tontouta) 공항에 도착했다.

겨울옷을 입고 출발한 우리는 만 하루 만에 프랑스의 한여름보다 더 뜨거운 곳에 와 있었다. 외투를 벗어 속에 껴입은 가벼운 여름옷으로 변신했다.

약 22시간의 이정을 끝낸 이 비행기는 우리를 한적한 작은 공항 가운데 조용히 내려놓았다. 나는 긴 여행에서 다소 지친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오자 마치 led 전등을 갈아 끼운 듯이 환하게 눈부신 햇살과 바싹바싹 안구가 마르도록 건조한 공기가 벌써 내 코 끝에서 이것이 쾌적한 열대성 공기라고 상큼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동안 한국이나 프랑스에서 수십 년 동안 맡아온 그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이토록 짤막하나마 진한 인상을 주는 이 생소한 정경을 다 눈에 담기도 전에 우리는 통관 절차를 거치고 다시 왈리스 섬(île de Wallis)으로 가는 작은 비행기에 올랐다.

이때부터는 모든 것이 이국적이고 낯선 풍경들이다.

냄새도 색깔도 언어도 생김새도 공기도.


왈리스행 비행기 안에는 한낮의 나무 그늘 아래 모여 있는 듯 이방인들로 깜깜하다. 흙빛의 탄력 있는 매끄러운 피부색에 까만 머리, 넓적한 얼굴과 쩍 벌어진 어깨, 그 큼직한 몸집만큼 짜랑한 음성, 알 수 없는 말로 왁자지껄 매우 요란스럽다. 왈리스, 푸투나 원주민들이다.

새해 새 학기를 맞아 본국에서 교체, 유입되는 메트로폴리탄인들과 더불어 이 새로운 시점, 낯선 분위기에 모두가 기대찬 호기심과 부푼 마음으로 반짝반짝 생기가 돈다. 인종을 불문하고 우리를 포함한 폴리네시아 원주민 전부의 마음까지 구름처럼 하얗게 들뜬 모양새다.

내가 그들에게 가지는 파란 호감처럼.

이 팽팽하게 긴장된 호기심은 내 몸속 세포들을 하나 둘 덩달아 일깨워 어깨와 엉덩이를 치켜들어 들썩이게 했다. 그렇게 내 마음에 터진 구체적 새로운 싹이 돋아나 동그란 눈을 더한층 크게 뜨고 요리조리 고개 돌려 내 관심을 불태웠다.

우리는 마티스가 폴리네시아를 갔듯이 고갱이 타이티 섬에 도착하였듯이 3시간여 만에 뉴 칼리도니아에서 폴리네시아 왈리스 섬에 닿았다.



DSCF5833.jpg 왈리스 공항


옥색 바다를 낀 작은 산호섬은 쨍쨍한 태양 아래서 모든 것들이 싱싱하게 꿈틀대고 강렬함이 우글거렸다. 적도와 가까운 이 섬은 누메아 톤투다 공항에서 느낀 산뜻함과는 또 다른 무거운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어떤 원주민이 내 목에 걸어준 시큼 달큼한 열대 꽃 향기 진득이 풍기는 환영식 생화 목걸이에서 비로소 나는 여기가 폴리네시아 섬이라는 걸 실감 나게 했다.

젖은 땀이 눅눅하게 밴 묵직한 생화 목걸이가 번들거리는 얼굴 밑에서 미끈 끈적 푹푹 아래로 처져 내렸다. 그렇게 생소하고 낯선 땅에서 생면부지 사람들과 어리둥절 한나절을 보내고 하오 누군가의 도움으로 왈리스 바닷가 소박한 모아나 후(Moana Hou) 호텔에 숙소를 잡았다.


다음날, 우리는 간단한 행정 수속을 마치고 15인승 푸투나행 소형 비행기에 올라탔다. 이 작은 비행기를 보는 순간 난생처음 경험 앞에서 덜컹 나는 호기심보다 두려움과 고통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과연 무사할 수 있을까? 비행도 내 멀미도?

그렇게 좁은 공간에서 옹기종기 여남은 명 앉은 비행기가 막 출발을 하자 신기하게도 내 마음이 차분히 돌아서 오히려 놀이동산 기구에 올라 탄 듯 즐겁고 신선했다. 기이한 새로운 비행으로 가슴까지 부풀었다.

우리의 소형 비행기가 30여분 남태평양을 가로질러 고도를 낮추자 넘실넘실 흰 뭉게구름이 길을 열어 비껴준다. 까마득 아래로 출렁이는 인디고 물감색 바다 한가운데서 크고 작게 마주한 두 개의 조그만 섬이 호젓이 눈앞에 펼쳐졌다. 푸투나섬(île de Futuna)과 사람이 살지 않는 터부의 땅 알로피 섬이다.

이 소형 비행기는 짧고 유일한 활주로에서 마치 바다를 뛰어들듯이 온 몸을 비틀거리며 미끄러지더니 그렇게 우리들을 무사히 지구의 끝 외딴섬 푸투나에 내려놓았다.

이 최초로 밟아보는 미지의 땅, 원시적인 섬.

마침내 사 년간 내 강인한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DSCF5830.jpg 푸투나행 소형 비행기 내부


DSCF5831.jpg 푸투나 공항


DSCF4601.jpg 푸투나 섬 말레아 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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