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들이 돌아왔다.
조용한 일요일 아침과 정적도 희뿌옇게 감싼 자욱한 안개도 습한 추위와 잿빛 하늘, 외부인 출입도 약속된 방문자도 없는 날, 작년 이맘때 보았던 익숙된 것들이 어느새 제자리를 되찾았다.
겨울이 돌아왔듯이 우리에게도 자유와 평화가 왔다. 비로소 해방된 자유로운 날.
코로나 19로 어수선했던 봄은 가느다란 기억 끄트머리에 남아서 어련 거릴 뿐 순식간 사라져 갔고, 여름과 가을도 감쪽같이 잃어버렸지만, 언제 문턱을 넘었는지 모르게 겨울이 성큼 와 있다. 그 낭만을 올 들어 제대로 처음 느껴본다.
어느덧 신랄했던 인생 소설의 클라이맥스 한 단락이 넘어간 듯한 이 안도감!
그동안 묵직하고 뻑뻑했던 가슴과 아랫배가 펑 뚫리면서 어깨 죽지가 절로 내려간다.
지붕 물받이 설치와 나무 외벽의 코너 막음을 마감으로 에샤포다쥬(échaffaudage, 비계)를 철수하고 까세르(Karcher, 물청소하는 고압 세척기의 이름)로 바닥 물청소까지 하고 나니 집 외향이 제법 훤칠하게 모양새를 갖추며 드러났다. 샴페인은 다음날 터트리기로 하고, 우선 에코 전문 시공사 완공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이렇게 올해의 숙원사업이었던 대공사가 끝이 났다.
내부공사도 연이어 막을 내렸다. 미처 빗나간 부분의 잔손질들은 어차피 살면서 발생하는 문제들처럼 앞으로도 계속해서 맞추어 수정해 나가야 하는 것들이다. 어디 완벽이란 게 있겠는가?
그 무엇보다 긴 시간 짊어지고 있던 무겁고 커다란 짐꾸러미를 마침내 내려놓은 양 말할 수 없이 홀가분한 기분이다. 그야말로 해방을 맞은 듯이 자유롭다.
이제부터는 공사 동안 눈 덩이 불어나듯 두툼하게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묵은 때를 걷어내야 하는 대청소와 짐 정리가 산더미처럼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남은일은 다음날 걱정하기로 하고, 몇 달 만에 찾아온 이 평온한 일요일을 여유롭게 실컷 즐기고 싶다.
우리는 느긋하게 아침식사를 마치고 축축한 안갯속을 비집듯 걸어서 몽모홍시 광장 일요장을 찾았다. 그동안 먹지 못한 라오스 요리를 사러 갔다. 이처럼 남편과 둘이서 한가로이 걸어보았던 게 언제였던가?
음, 이 상큼함, 함초롬한 12월 아침나절의 공기!
프랑스 봉쇄 해제와 더불어 어느 다른 장날보다 더 많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아쉽게도 라오스 간이식당차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하여 통닭구이 한 마리를 사들고 왔다.
남편은 까브(cave, 지하실)로 내려가 적포도주 한 병을 들고 와 뚜껑을 따면서 "비로소 해방된 일요일인데, 이토록 좋은 시간을 그냥 보낼 수가 없지" 란다.
그렇다, 축배를 들어야 비로소 우리의 자유와 평화가 실감 나는 것이다.
우리는 부엌 식탁에서 포도주잔을 들고 통닭을 뜯으며 더욱 쾌적하고 새롭게 확장되어 탄생한 이 공간에 감개가 무량하다. 디자인은 물론 부엌장 구도와 배치, 페인트 색과 수도꼭지 하나까지 우리의 고심과 아이디어가 닿지 않은 곳이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소박하나 이 성공적인 결과물에 자아도취되었다.
넓은 창으로 함박 하게 들어오는 그윽한 겨울 풍경의 고적함이 있어 더욱 운치가 있다. 안개에 싸여 은은히 비치는 언덕 위 나뭇가지 아래 기하학적인 집들을 쳐다보던 나는 "스위스의 어느 마을에 와 있는 듯하다"라고 말한다. 드디어 우리는 인생 소설책 한 권을 접고 자연 영상 다큐를 바라다본다.
평소보다 많이 마셨다. 뺨에 열기가 오르고 분위기도 익었다.
내친김에 나는 "오늘 함께 시댁을 방문하자, 시어른들 못 뵌 지도 오래다"라고 남편에게 제안을 했다.
얼마만의 방문인가?
남편은 일주일마다 가던 시댁을 공사기간 동안 이주일에 한 번으로 다녔었다. 나는 공사 시작 이후 시어른들을 못 뵈었다.
"시아버지 내 얼굴 잊어버리시지는 않았을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더니, 남편은 "그럴 리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친절하게도 위안을 준다. 분명 내 방문의사와 제안에 그 역시도 속으로 기분이 좋았을 것이리라.
시댁에 도착하였다.
현관문을 열고 나는 먼저 시어른이 계신 이층으로 올라갔다. 해가 저문 것도 모르시는지 전등불도 켜지 않았다. 깜깜한 계단을 올라서니 푸르스름하고 희미한 빛이 가늘게 새어 나온다. 잠잠한 실내, 소리는 죽어있는데 화면만 움직이는 티브이, 마주한 소파에 움푹 두 분이 나란히 앉아 계신 모습, 마치 어두운 영화관에서 밀애를 나누듯이 은밀하다. 언제부터 그렇게 앉아 계셨는지, 어둠이 흡사 두 분을 꼭 감싸 안고 있는 것도 같았다.
티브이를 켜놓고 꼿꼿이 등을 세운 자세로 졸음 상태의 시아버지와 그 곁에서 시어머니는 몸을 반쯤 옆으로 기울어 머리를 편안히 시아버지 어깨에 푹 기댄 채, 정답게 꼭 붙어서 소파에 파묻혀 졸고 계신 것이다.
그 모습이 어찌나 정겹고 아름다운지, 나는 그들을 깨우지 않고 계속 그대로 보고만 있고 싶었다.
귀가 밝지 못하시기도 하지만, 뜻밖의 방문으로 아니면 기력이 없어 예상조차 못하신 건지, "봉슈와(Bon soir!, 저녁 인사)" 하면서 내가 다가갈 때까지도 우리가 들어온 소리도 내 존재도 알아채지 못한 채 부동자세로 계셨다.
그래서 나는 그 아름다운 두 분의 모습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한편으로 애잔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얼마나 따뜻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던가!
"봉슈와, 싸바(Bon soir, ça va, 안녕, 좋아요), 시어머니, 시아버지" 하고 목청을 크게 높이자 그때사 허리를 일으키더니 놀란 듯이 나를 맞이하신다.
우리들의 해후와 함께 금세 활기를 되찾아 예전의 분위기로 돌아와서는 이것저것들을 서로 여쭙고 답하며 회포를 푼다. 시아버지 기억도 아직 크게 심각한 정도는 아니셨다. 나를 잘 알아보셨고 언제나처럼 "목마르지 않냐?"부터 시작해서 "네가 앉은자리가 불편하지는 않니?" "티브이 볼래?" 더 기쁜 무엇을 안겨주지 못해 애절해하신다.
두 분은 가끔 티격태격 귀여울 정도 서로에게 투정을 부리시기도 핀잔 주기도 하지만, 70년 세월이 넘도록 서로가 떨어져 살아본 적이 없다. 부모, 형제, 자식보다 더 긴 시간을 동반자로 함께 인생 희로애락을 거쳐 생의 막바지 여로에 서 계신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답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청춘으로 만나서 90세가 넘어 기력이 떨어질 때까지 어느 한쪽이 먼저 떠나 홀로 남겨두거나 남겨지지 않고 나란히 기대며 살아갈 수 있다는 건, 분명 그 어떤 것보다 더 큰 복으로 태어나 행운을 얻은 것이리라!
그 모습을 곁에서 보는 우리 또한 호운이 아닐 수 없다.
어느 날 남편에게 이 같은 말을 했을 때, 그 또한 내 말에 적극 동의하면서 "어느 한분이 먼저 가시면, 분명 남은 분도 연이어 가실 것 같다고" 덧붙였다. 나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동감을 표했었다.
그러면서 그가 목격한 감동적인 또 다른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몇 년 전 일이다. 시아버지께서 혼자 슈퍼에 시어머니 심부름을 가셨다가 돌아오시던 길에 그의 기억이 잠깐 외출하여 집이 아닌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자동차를 몰고 달렸다. 어느 낯선 길에서 한참을 헤매시다가, 기억은 없지만 본능적으로 안전한 곳에다 차를 세워두고, 몇 시간을 걷고 걷다가 지친 나머지,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여 돌아오셨던 적이 있다. 우리도 시아버지를 찾아 헤매다가 결국 밤이 이슥해서야 관할 경찰서에 신고까지 했던 날이다.
남편은 내게 "그때 기억나지, 그날 늦은 저녁 녁에야 돌아오신 아버지가 지쳐서 부엌 식탁 의자에 덥석 앉자, 리리(시어머니 애칭)가 그 곁에 바짝 붙어 앉으시더라" 하고 그 순간의 감회를 다시 떠올리며 말한다.
"너도 알잖아, 평소 같으면 서로 식탁 모서리를 두고 떨어져 앉으시는데, 그때는 아버지 곁에 꼭 붙어 앉으시더라"
시어머니께서는 시아버지의 무사안전 귀가하심에 대한 반가움과 감격으로 인간적인 감개를 금치 못했었던 그 모습에서, 새삼 내 남편은 그의 부모님에 대한 진한 감동이 자신의 심장을 두드렸던 것이다.
이 또한 우리의 미래를 예측하고 보듯이.
오늘도 침묵을 깬 시어머니는 시아버지의 수선함에 핀잔을 주신다. "피에르, 좀 조용히 앉아 계시오, 누구도 티브이에는 관심 없다오, 당신을 보러 며느리, 아들이 왔는데... 제발 앉아서 당신이 좋아하는 며느리 얼굴이나 좀 보시구려..."
시아버지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티브이 볼래? 켜 줄까?" "목마르지 않나? 마실 거 줄까?" "볼래(volet 덧창 문)를 닫아야지..." 등 평소 그의 부지런한 성격 따라 가만히 한자리에 머물려 계시지 않는다.
이렇듯 우리의 자유를 시부모님과 함께 나누고, 그들과도 짧은 작별을 남긴 채, 또 다른 해방된 가벼운 마음과 감회에 젖어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