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나 상담일지1
이번 달까지만 하고 그만두겠습니다
오랜 시간 입안에 품고 있던 말을 내뱉었다.
퇴사하기로 결정하고 나서도 어떻게 말해야 할까 고민스러워 입이 무거웠는데 막상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하고 회의실로 들어가 앉는 순간 말에 힘이 실렸다.
나는 3년 차 직장인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이곳에서 일하는 것이 낯설다. 처음에는 처음이니까, 낯선 것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당연히 시간이 필요하겠거니 했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가 처한 현실이라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내가 항상 낯설었다. 이런저런 계기들이 쌓여서 ‘이건 아닌데’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고 그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나는 소속감 없는 이방인이 된 것 같다. 그리고 출근하면 늘 퇴사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경솔해서는 안 된다”라고 생각했다.
‘퇴사를 하고 싶다’는 것과 ‘퇴사를 하겠다’ 사이에는 차이가 크다. ‘하고 싶다’는 것은 막연한 바람이라면 ‘하겠다’는 것은 의지이고 결심이다. 그리고 결심에는 따라오는 것이 많다. 선택과 포기, 책임과 방임, 인정과 무가치 등등. 모두 무거운 말이다. 바람을 바람으로 날려 보낼 것인가, 결심으로 결정화시킬 것인가. 우선 그것을 ‘선택’ 해야 했다. 나는 진지하게, 또 현실적으로 생각을 해 보기로 했다.
우선 가장 먼저 한 일은 퇴사로 잃을 것과 얻을 것을 따져보기로 한 것이다.
퇴사로 잃을 것은 안정적인 수입과 이 조직이 가지고 있는 장점들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안정적인 수입이라는 장점은 나의 경우에는 크게 힘을 쓰지 못한다. 월급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매달 같은 수준의 월급이 통장을 스치고 지나간다는 것을 안정성이라고 한다면 장점이랄 수 있겠다.
월급 외의 이 회사의 장점은 몇 가지가 있는데 먼저 집과 가깝고 특별한 행사가 있는 것이 아니면 칼퇴(칼 같은 퇴근)가 보장되어서 워라벨(워크-라이프 벨런스)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고용이 비교적 안정적이라는 점이다. 나는 이곳에서 (정규직은 아니지만) 무기계약직으로 일하고 있었다. 정규직과의 차별사례가 거의 없고, 안정적인 국가보조금 사업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고될 가능성도 매우 적다. 게다가 퇴직 전 내 자리는 지난 몇 년간 공을 들여 인턴, 강사, 육아휴직자 대체직을 거쳐 따낸 것이었다. 근로계약 기간을 조금씩 연장하다가 근로계약 기간이 명시되지 않은 연봉 계약을 하기까지 말 못 할 고민도 많았다. 고생 끝에 내가 담당하던 프로젝트가 확장되면서 새로운 일자리가 생겼고 대체직이던 내가 그 업무를 담당하여 계속 일하게 된 것이다. 그때 새로운 근로계약서를 쓰면서 지난 몇 년간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보람을 느꼈다. 그리고 가치 있는 일을 한다는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는 장점도 있었다.내가 일하던 곳은 특정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고, 이들을 지원하는 교육과 상담을 진행하던 기관이었다. 이 일을 하면서 내가 그동안 잘 몰랐던 어려움을 겪고 있는 대상자들도 만나고, 그들에게 도움을 주고 내 생각의 지평도 넓히며 이 세상이 나아지는 데 작은 기여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이렇게 보면 내가 다니던 직장은 그리 나쁘지 않은 곳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회사를 다니며 여러 가지로 내가 참을 수 없었던 것이 있었다. 이런 불평들이 나를 현실감 없는 존재,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로 소외시켰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벗어난다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퇴사를 하게 된다면 얻게 될 것들을 생각해 보았다.
가장 큰 것은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만두기 1년 전부터 나는 각종 스트레스로 인한 신체화 반응을 겪고 있었다.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통증을 느꼈고,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 아무것도 못하고 누워만 있는 날이 많아졌다. 시작은 갑작스러운 팀 체제와 사업의 개편 그리고 인사이동이었다. 사업을 한창 진행하고 있는 시점에서 예고 없이 찾아온 변화는 큰 스트레스였다. 그리고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에는 비민주적인 조직 구조, 관리자들의 무책임이 있었다. 조직은 조직 구성원이 이런 일로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나는 그 스트레스를 고스란히 안고 아무렇지 않은 듯이 일상적인 업무를 수행해야 했다.
그런데 이 일상적인 업무 역시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내가 맡고 있는 업무는 대상자를 직접 만나서 종일 교육해야 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이었다. 교육 기간 중에는 늘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사람을 만나고 대화하고 상담하고 교육하는 것은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업을 2년 넘게 진행하다 보니 고민도 많이 생기고 피로감도 쌓였다. 그리고 어떤 벽에 부딪힌 것 같다 생각했다. 그렇지만 조직은 나의 고민을 ‘우리’의 문제로 여겨주지 않았다. 누구도 나에게 사업적인 조언을 해 주지 않았고, 성과만 따지고 들었다. 결국 내가 맡은 사업의 어려움은 나에게만 주어진 과제였다. 풀리지 않는 숙제를 안고 전전긍긍하며 나는 점점 소진되었다.
나는 조직이, 업무가 주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쉬고 싶었다.
두 번째로 얻을 것은 유능감이었다. 내가 일하는 기간 동안 회사는 여러 가지 면에서 보수화되고 있었다. 지난 몇 년간 양적인 성장을 이루었고, 이러한 성장으로 인해 우리가 더 많은 일, 더 필요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결과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사업이 정비될수록 새로운 것을 시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줄었고, 기존의 틀을 유지하고 이것을 수적으로 확대시키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질적인 것, 가치 지향적인 것, 대상자에게 필요한 것보다 양적인 것, 실적 지향적인 것, 그럴듯해 보이는 것이 점점 더 중요해졌다. 후자가 사업의 필요성과 지속성을 보장해주는 지표가 된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것만이 우리의 노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절대적 기준이 될 수는 없다. 내 사업이, 내가 도구화되고 있다는 느낌은 나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이런 조직의 변화 속에서 사람들도 변해갔다. 한때는 같은 것에 보람을 느끼며 열정적으로 일하던 선배는 비겁한 변명이나 해대는 무능력한 상사가 되어 있었고, "우리가 어쩌겠어요."라고 말하는 동료들도 많아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견디기 어려운 건 나 자신의 변화였다. 나 스스로도 가치와 성과 사이에서, 문제제기와 침묵 사이에서 어쩔 수 없음을 선택하는 순간이 늘고 있었다. 나는 내가 속한 환경을 돌파하며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 만큼 진취적인 사람이 못되었다. 그 시기에 쓴 일기를 보면 어떤 일에서 시작해서 결국 나의 무능함을 냉소하는 글들이 많다. 나는 이 늪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유능감을 되찾고 싶었다.
그렇게 2년을 버티고 난 다음부터 이제는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출근하면 매 순간 '나는 잘 살고 있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나는 내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는 것이 중요한 사람이다. 아무리 좋은 말을 갖다 붙여도, 애써 상황에 대한 변명을 해 보아도 나는 지금의 내가, 내가 속한 조직이 한심했다. 그리고 이곳에 있으면 나는 더 한심해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더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지’하게 된 순간, 이성적으로 꼽아보던 퇴사의 장점과 단점은 다 빛을 바랬다. 이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결정적 이유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나는 그렇게 '퇴사를 하겠다'고 결심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