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나 상담일지3
퇴사하기로 마음먹은 시기가 두세 달 정도 남았을 때 주변 사람들에게 퇴사 사실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십수 번 퇴사 계획을 알리며 퇴사를 결정하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물론 상대에 따라서 나눌 수 있는 이야기의 깊이는 달랐고, 어떤 경우에는 그저 “그만두겠다” 한마디만 하고 말 수도 있었지만 애써 이유를 말했다. 그때 나는 누구에게든 설명하고, 이해받고 싶었던 것 같다.
몇 번이나 따져보고 또다시 생각해서 신중하게 결정한 일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꼭 퇴사를 해야만 하는 이유를 분명한 언어로 설명하여 상대방으로 하여금 고개를 끄덕이게 할 재간이 나에게는 없었다. 진짜 퇴사할 줄은 몰랐다고 놀라는 사람, 너 그럴 줄 알았다고 그냥 받아넘기는 사람, 다시 생각해보면 안 되냐며 아쉬워하는 사람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나의 이유를 설명을 하고, 그들이 던지는 질문에 답을 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세 가지로 나뉘었다. “철없다”와 “멋지다”, 그리고 그 둘이 아닌 나머지이다. “철없다”라는 사람들은 내가 아직 순진하고, 직장에 너무 많은 것을 바라고 있다고 말했고, “멋지다”라는 사람들은 쿨하게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 부럽고 대단하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두 가지 반응을 보였다. 모두 좋은 마음으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런 반응을 반복적으로 접하면서 나는 내 고민과 결정이 상대에게 충분히 이해받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동안 애썼다, 동료를 잃어서 아쉽다 등등의 말을 하는 소수의 나머지가 있었다.
“철없다”는 사람들은 나의 고민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들은 내가 너무 이상적인, 아니, 환상적이기까지 한 조직관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월급을 받으며 생활하는 사람들의 처지라는 게 원래 다 맞춰주고 그런 거 아니겠냐”, “어느 조직이나 문제가 있고, 어딜 가나 이상한 사람은 있지 않나” 결국 내가 기대하는 것은 직장을 그만두거나 다른 직장을 찾는다고 해서 해결될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것은 이 팍팍한 한국 사회에서 직장인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경험과 추측에 근거하여하는 충고였다.
하지만 나는 이 충고가 싫었다. 아니, 거칠게 이야기해서 협박 같이 들리렸다. ‘세상은 원래 그런 거야. 그러니까 너도 별 수 없어. 대충 맞춰서 살아.’라는 협박 말이다. 그렇지만 세상이 그렇다고 해서 나도 거기에 맞춰서 살아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그리고 내가 이런 선택을 한 것은 세상을 몰라서도 치기어려서도 아니다. 나도 나름의 고심 끝에 신중하게 결정을 한 것이다. 이 곳을 벗어난다고 해서 좋고 새로운 것이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이 곳을 벗어나지 않으면 다른 것을 찾을 수 없다. 혹시라도 더 나은 것이 있을지 모르는 일이라면 나는 아직은 좀 더 찾아보고 싶었다. 불안과 두려움을 감수하면서 말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조금 더 현실적인 충고를 한 사람들도 있다. 혹여나 이 조직이 정말 나와 맞지 않아서 그만두더라도 다음 직장을 알아보고, 아니, 최소한 퇴사 후의 삶에 대해 밑그림이라도 그려 놓고 그만두는 것이 좋다는 말이었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잘 못하는 사람이다.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나에게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거리를 두고 다른 걸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나는 그 상황에서 조금 벗어나야 이게 진짜 아닌 건지, 왜 아닌지,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정리가 되는 사람이다. 그래서 다음 살 길을 찾고 그만두라는 것은 나에게 ‘별다른 수 없으면 그냥 대충 다녀.’라는 말 같이 들렸다.
반대로 “멋지다”는 사람들은 나의 고민에 깊은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들은 사실은 자신도 그만두고 떠나고 싶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그러지 못하는데 ‘때려치움’을 실천한 내가 너무 멋있는 것 같다는 말을 했다. 또 그만두면 여행 갔다 좀 쉬겠다는 나의 모호한 퇴사 후 계획을 들으며 부럽다고 말했다. 그러면 나는 그저 겸연쩍게 웃었다. 상대방이 호들갑스럽기까지 한 반응을 보이기라도 하면 대단한 것도 없는데 대단한 취급을 받는 것 같아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들은 결국 ‘자신’과 ‘나’를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내가 그들과 처지가 다르고 원래 좀 특이하고, 그래서 이런 특별한 결정을 했다고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어제도, 아니 오늘도 그의 옆자리에서 일하며 그들과 같이 매일 삶에 지고, 그럼에도 내게 주어진 삶을 잘 살아내고 싶은 평범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나는 “철없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충고나 조언을 하기보다 내 결정을 존중하고 지지해 주었으면, “멋지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내 고민을 좀 더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나와 같이 일하던 동료가 이런 것 때문에 힘들어했구나 하고 한 번은 돌아봐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것은 욕심이었을까.
이런 불편한 반응 속에서도 내가 ‘퇴사’에 대한 고민을 나누고 싶었던 것은 ‘나’라는 사람이 약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대체로 내 마음대로 사는 편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누가 뭐래도 내 갈 길을 걸어갈 만큼 자아가 단단한 사람은 아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큰일을 하려면 다른 사람의 지지가 필요하다. 그때도 그랬다. 실은 나도 내가 어쩌면 너무 대단한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냥 현실에 안주하면서 직장 밖에서 자아를 찾고 실현하면 되는데 괜한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간의 직장생활만 되짚어 봐도 모두 저마다 때려 칠 만 한 이유가 있었고, 나는 그 이유를 외면하지 않았기에 이 나이 먹도록 커리어가 쌓이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다시 그만두더라도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격려와 지지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고 싶었다.
다행히도 소수이지만 나의 욕구와 의지를 부정하지 않고, 내 고민에 귀를 기울여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내 생각을 좀 더 단단히 정리해나갈 수 있었다. “그동안 정말 수고하고 애썼다”, “나에게 고민을 나눠줘서 고맙다”, “잘 다녀와서 맥주나 마시자”, “함께라서 즐거웠고 마음을 나눌 수 있어 따뜻했다”, “그간 좋은 동료가, 자극이 되어주는 동료가 되어줘서 고마웠다”, “동료가 떠나는 것은 아쉽지만 새로운 친구가 생긴 거라 생각하겠다”, 등등 진심 어린 말들은 정말이지 위로가 되었다. 나는 '퇴사'라는 사건을 또다시 겪으며 든단한 지원군을 얻었고, 새로운 친구를 만났고, 내 선택에 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철이 없지도, 멋지지도 않은 나는 퇴사 후는 퇴사 후에 걱정하기로 했다.
나의 퇴사일은 그렇게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