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나 상담일지5
꿈같은 여행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본격적으로 생계전선에 뛰어들어야겠지만 새로운 직장을 찾는 것을 당분간 유예하기로 했다. 여행하며 느낀 것, 또 지난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더 고민해 보고 싶었다.
그동안 벌어놓은 많지 않은 돈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일상을 복원하려 노력했다. 그동안 일을 하느라 돌보지 않았던 나를 돌아보았다. 미뤄둔 집안일을 했고 내가 좋아하던 활동들을 다시 발견했다. 오랜만에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즐거움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활동을 통해 무언가를 알아가는 즐거움이 다시 충만해졌다. 읽고 쓰는 것은 즐겁지만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일이기 때문에 직장생활을 할 때는 애써 하고 싶지 않았다. 무언가 접하고 싶고, 새로운 자극을 받고 싶을 때는 영상을 봤다. 영상 매체를 비하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영상매체의 시청자가 되면 책의 독자보다 수동적이어도 되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런 온전한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고립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가치 없는 것을 위해 시간을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걱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조금 고립되어도, 남들이 가치 없다고 해도 내가 좋으면 그만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치 않았다.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은 ‘팔자 좋은 소리 한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아니, 남들뿐만 아니라 직장을 다니던 1년 전의 나도 분명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휴일에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던 그때에 비하면 지금의 삶이란 더 바랄 것이 없는 것이어야 하는데 나는 또 무엇이 불만일까.
생각해 보면 그때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은 사실은 많은 것을 하고 있는 순간이었다. 나는 이 아무것도 하지 않음은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고, 이 순간이 끝나면 다시 출근을 해야 한다는 사실 또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잠시나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 빛나는 순간을 더 드라마틱하게 누리고 싶은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내일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고, 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은 큰일이 없는 한 내일도, 모레도 이어질 것이다.
이렇게 유유자적 사는 것은 분명 즐거운 삶이다. 그렇지만 평생 먹고 노는 것만으로 내가 행복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그게 아니었다. 나는 무언가를, 일을 하고 싶었다. 그렇게 하기 싫은 게 일이었는데, 물론 직장을 다니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지만, 새로운 방식으로 ‘일’을 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나에게 ‘일’은 무엇이고, 나는 이 ‘일’을 통해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일까.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은 ‘일’을 “무엇을 이루거나 적절한 대가를 받기 위하여 어떤 장소에서 일정한 시간 동안 몸을 움직이거나 머리를 쓰는 활동. 또는 그 활동의 대상”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니까 이 정의에 따르면 내가 ‘일’을 하고 싶다는 것은 ‘일’이라는 활동을 해서 몸을 움직이고, 머리를 쓰면서 무엇을 이뤄보고 싶다는 욕구가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이 일을 통해 이뤄보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흔히 사람들은 ‘일’을 통해 돈을 벌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면서 성취감과 보람을 느끼며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고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일’의 목적은 크게 생계유지, 자아실현, 사회적 역할 수행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물론 저마다 처해 있는 상황이 다르고, 또 각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기에 이 세 가지 목적 사이의 균형 관계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물론 분명한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가진 것 없는 사람들에게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은 조정할 수 없이,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는 문제일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소득을 우선순위에 놓고 ‘직업’을 찾는다. 사전에서 ‘직업’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일정한 기간 동안 계속하여 종사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다양한 일 적 활동 중 ‘생계’에 초점을 맞추어 지속적으로 하는 활동을 ‘직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직업’을 찾아 ‘노동’을 해야 하는 이유는 나는 먹고살아야 하는데, 먹고 살만큼 충분한 돈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나도 가진 것이 없으므로 ‘돈’을 쫓아 ‘직업’을 선택해야 할까. 생계유지가 대체 불가능한, 유일무이한 ‘일’의 목적이 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그러기에 나는 너무 다양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 ‘아사 아니면 과로사’를 선택해야 하는 냉혹한 현실에서 참 한가한 소리일지도 모르지만 ‘생계유지’라는 것을 잠시 뒤로 미루고 일을 하면서 즐거웠던 순간을 돌아보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그려보았다.
우선 나는 일을 통해서 내가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나를 발견하고 싶다. 그동안의 일 경험을 돌아보면 나의 흥미와 적성과 능력은 책 속에, 내 일기장에, 내 방에도 있지만 일 적 행위를 통해서도 계발되고 구현된다. 새로운 업무를 파악해서 이를 수행할 때,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때, 누군가를 교육할 때 나는 그동안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고,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을 느끼며, 새로운 능력을 발휘한다. 이러한 ‘일’을 통해 나는 실패도 하지만 스스로에 대한 유능감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과 관계 맺고 사회에 속하고 싶다. 일을 통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소통하는 법을 배우고 서로 돕고 그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다. 물론 피상적이지 않은, 긍정적인 관계는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직장’에서도 도움을 주고받는,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이 다수가 아니라고 해서, 그들을 만나기 어렵다고 해서 포기할 수 있을까. 귀한 것을 발견하며 나누는 경험을 통해 나는 혼자서는 알 수 없는 다양한 경험, 감정, 느낌을 알 수 있었다.
또 일을 통해서 나의 가치를 실현하고 싶다. 나는 나 스스로의 안녕도 중요하지만 나는 나 혼자 존재할 수 없고, 나의 마음이 평안하다고 해서 행복할 수 없다. 내가 속한 공동체에 만족하지 못하며, 이 사회가 나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거기에 티끌만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이 나 개인의 경제적 풍요와 만족을 위해서, 또 사회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면 좋겠다.
이러한 나의 욕구는 결국 ‘일’을 통한 자아실현과 사회적 역할 수행으로 수렴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일’을 찾아 ‘직업’으로 삼고 싶다. 물론 애초에 ‘직업’에 이런 것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이상일지 모른다. 그리고 위의 두 가지 목적은 ‘직업’이 아닌 취미나 다른 활동을 통해서도 실현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직업’은 내 생활에서 가장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쏟는 일이기 때문에 ‘직업’을 통해 구현할 수 있다면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그리고 애써 발버둥 쳐 봐도 결국 가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면 나를 덜 소외시키는 타협점을 찾는 것이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결국, 잘 먹고 잘 살고 싶은 것도 나이고,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사람들과 협력하는 관계를 맺고 싶은 것도 나이다. 물질적으로 보상받고 싶은 것도 나이고, 물질이 아닌 것으로 만족감을 느끼고 싶은 것도 나이다. 나는 이 모든 나를 인정하고, 어느 하나를 위해 다른 것을 극단적으로 소외시키고 싶지 않다.
이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바람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한번 애써 찾아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