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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직과 맞지 않는 사람일까?

미완의 나 상담일지8

by 선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간의 직장 생활을 돌아보며, 또 여러 번의 퇴사 과정을 곱씹어 보며 나는 혹시 내가 조직에, 직장생활에 맞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직장을 다니기 전까지는 내가 반조직적인 성향의 사람이거나 특별히 혼자서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조직에 속해 일을 하면 할수록 안정감과 소속감은커녕 내가 이곳에서 소외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러한 소외감은 나만 특별히 느끼는 감정은 아니다. 조직과 그에 속한 개인 간의 갈등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했고, 그리하여 개인과 직업 환경의 조화는 직업상담의 오랜 과제 중 하나였다.

직업적응이론에 따르면 ‘직업적응’이란 개인과 직업이 서로 조화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역동적인 과정을 말한다. 흔히 ‘적응’이라고 하면 어떤 결과(적응 또는 부적응)나 상태라고 생각하는데 이를 가변적인 과정으로 정의한 것이 인상적이다. ‘직업적응’이 이루어진 조화로운 조화로운 상태는 개인이 직업을 수행하기 위한 역량을 가지고 있고, 직업 환경이 개인의 직업가치(성취, 편안함, 지위, 이타심, 인정성, 자율성)를 충족시켜줄 강화요인을 가지고 있을 때 달성할 수 있다. 개인과 직업환경 간의 가치 불일치 문제에 대해서는 앞선 글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이번 글에서는 개인과 직업 환경의 적응 양상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한다.

만약 개인과 직업 간에 부조화가 발생하면 직업 상황에 대한 불만족이 생겨난다. 이 경우 개인은 이러한 상태를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인간은 자신이 속한 환경과 조화를 이루고 이를 유지하려 하는 속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느끼는 소외감은 나와 내가 속한 직업 환경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불만족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했지만 문제는 개선되지 않았고, 결국엔 이런 장기화된 부조화 상태가 부당하다고 느꼈다. 그렇다면 나는 구체적으로 무엇과 부조화했으며, 무엇에 대해 불합리함을 느꼈을까.


우선 내가 속한 조직이 무능력하여 문제적 상황을 만났을 때, 그 해결책으로 개인의 희생만을 강요한다는 점이 힘들었다. 조직에 속해서 일하는 사람으로 문제가 생겼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일정 정도의 희생은 불가피한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일상적으로 만나는 문제의 징후에 대해서는 방관하고 있다가 문제가 생기면 그때가 되어서야 조직원의 희생과 ‘노오력’으로 메우려고 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방적으로 강요된 희생과 봉사에 대해서 나에게도 당연한 권리가 있다고 말하면 ‘이기적’이고 ‘봉사 정신’이 없다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사실 이 조직이 겪게 되는 문제, 즉 예산이 삭감되거나 사업이나 조직의 기능이 재조정되거나 하는 일은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평소에 대상자의 동향을 파악하고 유사 기관의 사업을 모니터링하여 기존의 사업을 조정하고 새로운 사업을 기획하면 피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조직은 평소에 문제 제기를 하거나 발전 방향을 말하면 듣지 않았고, 이를 애써 외면했다. 마치 양치기 소년이 된 듯 한 느낌이었다. 점점 이렇게 나태하고 무능한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 애를 쓸 필요가 있는 것인지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다음으로 조직 내에서 공과 사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권력과 관계가 사유화되고 있다는 점이 견디기 힘들었다. 직장에서도 얼마든지 사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나 또한 직장에서 좋은 친구들을 만났고 그들과 사적인 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그렇지만 친밀감에 기반 한 사적인 관계와 일을 매개로 한 공적인 관계는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조직의 인사 등의 의사결정 과정에 이러한 사적 관계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의든 타의든 이러한 관계망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은 ‘까칠하다’, ‘비협조적이다’, ‘이기적이다’라는 평가를 받아야 했다. 그중 하나인 나는 결재를 받거나 업무를 진행하는 데 있어 여러 가지 불편한 상황을 겪게 되었다.

사람과 재화가 모여 활동을 하면서 만들어지는 에너지와 권력은 이 조직의 운영 목적을 위해 쓰여야 한다. 그러나 이 에너지가 특정 사람이나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쓰였다. 내가 속한 조직은 자영업체가 아니라 공공의 목적을 위해 설립된 조직이며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겪으면서 권력의 사유화에 대한 비판이 사회 일반 상식이 되었음에도 이 조직에는 반성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나와 조직의 부조화 상태에서 내가 일방적으로 조직에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 싫었다. 물론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것이 ‘커먼 센스’이자 ‘스탠더드’인 한국 사회에서 나고 자란 나는 어느 정도 이런 문화에 익숙하다. 그래서 스스로 너무 나가지 않았는지, ‘정 맞을만한 모난 돌’이 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고 반성을 할 때도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와 창의성이 시대의 화두가 된 이 시대에, 다양성과 평등을 주창하는 조직에서 여전히 조직은 ‘디폴트’ 값이고, 개인이 이에 일방적으로 맞추어야 한다는 식의 생각은 구태라고 생각한다. 개인이 직업과 부적응하고 있을 때, 이러한 부적응을 개선하고자 노력하고 있을 때 “어차피 조직을 바꿀 수는 없으니 개인이 포기할 건 포기하고 맞춰야 한다”라고 윽박지를 것이 아니라 그가 곤란을 느끼는 점이 무엇인지 묻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 조직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돌아볼 수는 없는 것일까.


결국 나는 이러한 불합리한 조직과 불만족스러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어 퇴사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조직과 맞지 않는 사람이 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비합리적’이고 ‘비민주적’인 조직을 싫어하며 이에 속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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