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나 상담일지9
나에게 일이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기대하고 일을 선택했는지, 또 무엇에 실망해서 그만두게 되었는지 돌아보면서 나는 나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고 직업에 대한 생각도 더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물론 안타깝게도 모든 게 명확해져서 내가 갈 길을 찾게 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확실히 이전보다 조금은 더 눈이 맑아진 기분이었다.
그 사이 반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참 빠르다. 이제 슬슬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았다.
새로운 일을 알아보기 전 명확한 것은 현실에서 나에게 꼭 맞는 완벽한 일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나는 여러 가지 조건을 놓고 내가 포기할 수 없는 것과 타협할 수 있는 것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우선 분명한 것은 나는 여전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물론 일로만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은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하고 다른 활동을 통해서 즐겁고 만족한 삶을 살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비교적 좋고 싫음이 확실한 사람이고 좋아하는 것을 대할 때와 싫어하는 것을 대할 때의 태도와 자세가 무척 다르다. 많은 보상이 주어진다고 해도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면서 내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싶진 않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내가 흥미를 느끼고 사회적으로 가치 있다고 생각하고 어느 정도 성과를 낼 수 있는 일이다. 어떤 일이 그런 일일까?
생각하다가 교육 분야의 일이 그랬다는 것이 떠올랐다. 가르친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가치지향적인 일이다. 보수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에게 교육은 사회의 구성원을 사회화하는 활동일 것이다. 그러니까 대상자에게 사회에서 요구하는 지식과 사회에서 통용되는 가치를 가르치는 일이다. 그러나 진보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에게 이것은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활동이 될 것이다. 사회의 새로운 가치와 가능성을 발견하고 이것을 현실화시키기 일 말이다.
나는 어제까지의 세계에 속한 사람이지만 새로운 내일을 꿈꾸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리고 내일의 세계가 나를 괴롭혀 온 어제까지의 세계보다 더 자유롭고 아름다운 세계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런 세계를 만드는 데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다.
그 다음으로 나는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조직에서 일을 하고 싶다. 사실 혼자 일을 하는 것도 생각해 보았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니까 독립적으로 일을 할 수 있으면 어떨까. 창업을 하거나 프리랜서로 일을 하는 것 말이다. 처음에는 어렵겠지만 경력을 쌓아가며 강의 활동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일을 할 때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쪽이 더 좋았다. 나는 사실 나 스스로가 바라는 것만큼 진취적이거나 창조적인 사람이 아니다. 나에게 너무 많은 책임과 선택이 주어질 때, 그리고 이런 선택이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할 때 나는 선택이 두지고 위축된다. 그래서 함께 하는 사람이 있을 때 더 많은 것을 시도해 보고,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함께 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긍정적 효과는 나 스스로가 내가 속한 조직과 조직 구성원을 신뢰할 때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신뢰는 서로 존중하고 평등하게 일하는 경험 속에서 나온다. 물론 모든 면에서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결정을 하는 조직은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지향을 가지고 이러한 지향을 실행하기 위해 살피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조직이라고 생각한다.
위의 두 가지는 내가 행복하게 일을 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조건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포기하거나 타협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 있을까.
우선 경제적 보상이 있을 수 있다. 월급을 안 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보상이 적은 일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나는 생활을 하는 데 큰돈이 필요하지 않다. 사고 싶은 물건이나 먹고 싶은 것이 분명한 사람도 아니고, 갚아야 할 빚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돈을 쓰는 일이라고 해봤자 먹고 마시는 것과 책을 사고 취미 활동을 하는 것이 전부다. 사고 싶은 것이 있으면 돈을 모으고 이것이 꼭 필요한 것인지 여러 번 생각하는 것, 적당히 벌고 조금 쓰는 생활이 익숙하고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물론 가치 있는 일을 하니까 경제적 보상은 당연히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예전에 지역 시민단체에 면접을 본 적이 있는데 그곳의 분위기가 그랬다. 월급은 적고 일은 많은데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그 단체에서 제시한 임금은 최저임금보다 적은 돈이었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나에게 많지 않다, 적당하다는 것은 내가 받아들일 수 있고 또 사회가 용인하는 최저 수준의 벌이를 말한다. 적어도 최저임금 이상은 받아야 하고, 근로기준법에 보장된 권리는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소박하게 산다는 것은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지만 구조적인 가난은 사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사회적 인정이 있을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는 이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다.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 어떤 직장에 다니는지, 어디에 사는지, 돈은 얼마나 버는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위신과 가치와 권리가 책정된다. 누구나 다 알만한 직장에 다니는 것, 혹은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직업인이 되는 것은 가족 구성원 혹은 사회 구성원으로 존중받기 위해서 수행해야 할 과제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렇게 인정을 받기 위해 버티는 삶은 싫다. 나는 내가 내 스스로 인정하는 삶을 살길 바란다. 또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에게 책임감 있고,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어떤 ‘구실’을 못하고 있다는 가까운 사람들의 원망이나 사회적인 홀대가 좋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에게 더 중요한 기준은 나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은 내가 인정할 수 있는 조직에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고, 타협할 수 있는 것은 경제적 보상과 사회적 인정이다. 이런 좌표를 가지고 다시 한 번 직장을 찾아보기로 했다. 완벽한 접점을 찾을 수는 없겠지만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 안의 일을 찾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