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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저것 선택하기

바닷마을 작은집 20

by 선주

공정이 중반으로 넘어가니 세부적으로 결정할 것이 많다.
대부분 여러 가지 마감재를 고르는 일이었다. 주택의 마감재로는 실내의 벽지와 바닥재, 문, 몰딩 등이 있다. 벽이나 천정, 바닥과 같은 실내 공간의 면은 실내에서 주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는 부분이기 때문에 자신의 생활습관이나 미의식을 잘 고려해서 정해야 후회가 없다.


우리 집 벽지는 실크벽지가 아닌 합지벽지로 선택했다. 가격이 저렴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종이 100%의 소재라는 점이 더 크게 작용했다. 실크벽지는 종이에 플라스틱의 일종인 폴리염화비닐(PVC)을 더해 만든 재질이다. 오염이나 변색이 적다고는 하지만 (대개 플라스틱으로 만든 물질은 이런 장점이 있다.) 조금이라도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고 싶어 선택하지 않아다.
색상은 샘플 북을 보고 무난한 색으로 골랐다. 벽의 색깔이 너무 진하면 질릴 수 있다. 파란색 톤으로 할지 초록색 톤으로 할지 고민을 하였는데 바다 느낌으로 파란색을 골랐다. 거실은 옅은 하늘색, 방은 차분한 파란색으로 하였고 다락에는 짙은 파란색으로 깊이감을 주었다. 천정과 벽체는 같은 색으로 마감하여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공간이 넓어 보이게 하였다.
문은 ABS 도어로 시공하였다. ABS는 아크릴로니트릴, 부타디엔, 스타이렌(이름도 길고 어렵다. 대체로 합성수지가 그렇듯이.)의 줄임말로 이 세 가지 원료로 만든 합성수지, 즉 플라스틱이다. ABS로 판넬을 만든 뒤 원목 질감의 합성수지 시트를 입힌 것이 ABS 도어이다. 일반 플라스틱에 비해 충격이나 열에 강해서 다양한 생활용품과 자동차의 내외장재를 만드는 데 쓰이고 있다고 한다.
사실 이 문이 이런 복잡한 이름의 소재로 만들어진 것을 진즉에 알았다면 도배지와 같은 이유로 다른 대안을 찾아보았을 텐데 계약서와 설계도에 이 문으로 시공한다고 명시되어 있고 문은 ABS 도어로 하는 게 좋다는 분위기가 있어 사전 조사 없이 그냥 따라갔다. 단순히 합판 같은 것에 합성수지를 코팅한 것이겠지 생각했는데 안일한 생각 때문에 또 하나의 거대한 플라스틱을 소비하게 되었다.

집을 짓다 보니 우리 주변에 너무 많은 것이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볍고 강도가 높고, 원하는 형태로 가공하기 편하고, 가격이 저렴하고 이런 수많은 장점들 덕분에 플라스틱은 인류의 생활 전반에 널리 쓰이고 있다. 그렇지만 최근 이 플라스틱의 위험성이 전면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버려진 어마어마한 양이 플라스틱이 우리가 원하는 시점(사용자가 쓰임이 다했다 생각하여 쓰레기통에 넣는 시점)에 사라지지 않고 다양한 유해물질로 떠돌아다니며 생태계를 교란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플라스틱 빨대로 고통받는 바다거북과 비닐을 먹고 죽은 새, 그리고 인류의 건강을 위협하는 미세 플라스틱까지. 플라스틱의 위험성을 고발하는 이미지는 다양하다.
플라스틱 사용을 대폭 줄이지 않으면 인류가 플라스틱 때문에 멸종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암울한 예측까지 나오는 이때에 나름(!) 생태주의자라는 지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런 힘 빠지는 선택을 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다른 한 편으로 생각해 보면 플라스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먼저 넘어야 할 산이 바로 이렇게 너무 보편적이고 이것을 선택하는 일이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다는 점이다. 어느 한 밴드가 앞서 노래했듯이 습관이라는 건 무서운 것이다. 눈에 익은, 손에 익은, 하던 대로의 편안함에 익숙해진 선택을 하면 그 끝에는 플라스틱이 있다. 정말 의식을 가지고 공부하고, 불편함을 감수하고 배제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우리는 플라스틱이 주는 편리함에 기대어 생활하고 있다. (어차피 소비한 것, 나는 이 문을 보면서 반성하고 또 반성하며 천년만년 써 볼 생각이다.)

이렇게 중요한 소재 선택은 슬렁슬렁하고 내가 애를 써서 선택한 것은 색상과 모양이었다. 벽지와 마찬가지로 최대한 눈에 띄지 않고 편안한 색을 골랐다. 고민 끝에 고른 것은 살리나스라는 이름의 색이었는데 구조목보다 연한 나무색이었다. 문을 발주하고 같은 색상으로 몰딩(개구부와 벽면, 벽면과 천장면이 만나는 부분의 이음매가 보이지 않기 위해 가려주는 띠 모양의 부자재)과 걸레받이(벽면과 바닥면이 만나는 부분에 설치하는 부자재)를 주문했다.
그런데 며칠 후 살리나스 색상의 부자재가 출시되지 않아서 흰색으로 해야 한다는 답을 들었다. 문 색상과 몰딩 색상이 다르면 너무 산만할 것 같은데 왜 출시하지 않았을까 하고 의문이 생겨 인터넷을 뒤져 보았더니 살리나스 색상의 제품이 있었다. 시공사에 출시가 되었으니 다시 알아봐 달라고 문의했더니 거래처에 없어서 그런 거라고 새로 발주를 넣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엔 문이 잘못 입고되었다. 아무 무늬가 없는 민자로 주문을 했는데 막상 들어온 것은 민자 문 안에 네모 테두리가 더해져 있는 것이었다. 강하게 요구해서 제품을 물릴까 했는데 그러면 또 다른 쓰레기를 생산하는 것 같아서 덧댄 부분을 떼어냈다. 타카 자국이 좀 남아 있긴 하지만 유심히 보지 않으면 티가 안 나서 그냥 두었다.

좀 더 애를 써서 잘 알아봐 주지 원망하는 마음이 들다가도 이 집은 내 집이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꼼꼼하게 챙겨야 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누군가에게 맡겨 놓고 구경만 해서는 안 된다. 돈을 지불하였으니 알아서 해주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도 안 된다. 중간중간 찾아가서 확인하고, 궁금한 것은 물어보고, 달라진 것은 되물어야 한다. 귀찮고 어려워도 자꾸 마주해야 한다.
계약이나 법적 책임 그런 것도 중요하다. 문제가 생기면 그것에 기대 해결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이 집은 내가 살 곳이고 이 집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낼 사람은 나이다. 이 집에 문제가 생기면 책임 소재를 떠나 가장 크게 고통받는 것 또한 나 자신일 것이다. 그렇게 자꾸만 피하고 싶은 마음을 다잡았다.


선택도 책임도 나의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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