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곳도 바꾸게 한 육아라는 세계

by 서농쌤

남편과 나는 얼어붙은 얼굴로 산부인과에 갔다. 6주 차 태아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들었다. “저희는 아기 안 가지거나 늦게 낳으려고요~” 시부모님께 했던 이 말이 무색하게도 결혼 2개월 만에 첫째가 찾아왔다. 머리가 하얘졌다. 이제 막 시작한 공부방 운영부터 걱정되었다. ‘심장이 뛰고 있는 새 생명을 지울 순 없잖아. 그래 여자로 태어났다면 출산 경험도 해봐야지. 내가 미혼도 아니고. 좋은 일인 거야. 양가 부모님께서도 저렇게 기뻐하시잖아. 받아들이자. 잘된 일인 거야 ’ 공부방이 마음에 걸렸지만, 임신이 잘못한 일도 아니었기에 모두의 축복 속에 붕 뜬 기분으로 이게 맞는 방향이라 세뇌하며 현실을 받아들였다.



아쉽지만 한 학기 운영 후 공부방은 정리했다. 임신을 받아들인다는 건 아이를 가장 우선시하겠다는 의미였다. 방학 직전 수업 문의가 많이 있었지만, 일보다 더 소중한 아이를 위해 출산 육아 공부를 열심히 했다. 어떻게 아이를 낳을지부터 어떻게 아이를 키울지 까지. 공부하며 알게 된 자연주의 출산(약물 도움 없는 출산)을 하고 싶었다.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환경에서 태어난 아기를 아빠가 노래 불러주며 목욕시켜 주는 모습을 꿈꿨다. 내가 바라는 대로 아기를 낳게 될 줄 알았지만 33주 조기 진통에 입원하며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조기 진통이 있었으니 내가 마음만 먹으면 아이가 순풍 나오는지 알았다. 예정일 당일 40주가 되어 가벼운 마음으로 방문한 병원에서는 자연 진통을 기다리면 아이가 더 커져서 힘들 거라는 말과 함께 당장 유도분만을 하자고 했다. 무통 주사를 거절하고 끝까지 진통을 견디며 힘줬으나 결국 응급 제왕절개를 했다. 첫 출산은 정말 내 의지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출산의 어려움과는 다르게 첫 육아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친정이 가까워서 도움을 받으며 멈췄던 과외 일도 다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 집 대구에서 직장인 울산으로 왕복 4시간 거리를 출퇴근하는 남편은 아이가 잘 때 나가고 잘 때 들어오는 삶의 연속이었다. 가족이 함께하는 시간과 애착 형성을 중요시 여긴 우리 부부는 ‘아이는 부모가 키워야 한다’는 확고한 생각으로 아이 7개월 때 아무 연고 없는 울산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나에게 지옥을 선물했다.



친정과 시댁의 도움을 받을 수 없으니 당연히 일은 할 수 없었다. 24시간 내내 아이와 붙어 지내야 했다. 말할 사람도 없고 내 시간을 가질 여유도 없었다. 남편이라고 상황이 다르지 않았다. 열심히 일하고 돌아오면 육아를 해야 했고 그때 나는 집안일을 했다. 하루종일 쌓인 감정을 남편에게 하소연하면 내 감정을 받아줄 여유 없던 그도 하소연했다. ‘부처 같던 사람도 변하게 하는 게 육아구나. 이 힘든 걸 왜 아무도 알려주지 않을까.’



아이가 19개월이 되고 조금은 안정을 찾을 무렵 뜬금없이 배가 또 아팠다. 한번 경험한 직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둘째가 찾아왔다. ‘이제 조금 나아지려는데 또?’ 둘째는 가졌을 때부터 우울했다. 자궁경부 봉합수술을 하며 25주부터 34주까지 거의 두 달 동안 대학병원에서 누워 지내야 했다. 아무 잘못 없는 뱃속 아기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나뿐만 아니라 시간제 보육에 전전긍긍해야 했던 첫째, 일하랴 아이 보랴 정신없는 남편, 대구와 울산을 오가며 집안일을 봐주신 양가 부모님까지 각자의 무거운 시간이 쌓여갔다.



‘역시 아이는 안 낳았어야 했나?’ 두 아이가 동시에 울고 있을 땐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지? 이러려고 젊은 날을 열심히 살았나?’ 온갖 감정이 휘몰아쳤다. 한 명 육아, 두 명 육아, 코로나 독박육아는 또 다른 세계였다. 성인이 된 순간에도, 결혼했던 순간에도 삶의 주인공은 나였지만 출산 후 삶의 주인공에는 내가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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