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후 가장 친해진 동료는 늘 남미를 찬양했다.
프로 여행러인 그는 재작년에 아르헨티나를. 작년에 멕시코를 다녀왔다. 남미가 뭐가 그리 좋냐 물으면 그는 늘 가봐야 안다고 했다. 나는 굳이 저 멀고도 위험한 나라를 갈 필요가 있나? 간다면 쿠바 정도는 가보고 싶지만 괜히 험한 데 가서 장기 털리고 싶진 않았다.
내가 원하는 다음 여행지는 카프리, 그리스, 마요르카 등 아름다운 유럽의 휴양지.
유럽의 클래식한 건축물도 감상하며 동시에 지중해에서 수영하며 여유를 만끽하고 싶은 욕심. 하지만 나는 이직한 지 이제 4개월이 되었다. 1개월 만근 시 연차 1개가 쌓이는 구조이다. 물론 힐링연차라고 경력/정규직 무관하게 연 6일이 나오는 휴가도 따로 있다. 아무튼 휴가를 쓰면 어디든 떠날 수는 있지만, 문제는 이제 막 이직 온 나에게 장기 휴가는 '눈치'가 보인다는 것. 어떻게 하면 연차를 많이 사용하지 않으면서 멀리 여행을 떠날 수 있을까? 구글캘린더부터 켰다. 오. 추석. 연차를 2개만 쓰면 12일이 나왔다. 대박이다 바로 스카이스캐너를 돌렸다. 그리고 바로 휴가계획을 접었다. 가장 싼 티켓이 300만 원인데 환승 2번에 총 비행시간 30시간..ㅋ. 난 못 가.
그래, 이직 첫 해인데 눈치도 보고 업무도 빨리 익힐 겸 그냥 올해는 휴가 없다셈 치자.
는 구라.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여행 적기를 찾아 나섰다. 그래도 년에 한 번은 해외로 휴가를 가고 싶었다. 오호라 5월 초가 좋아 보인다. 5/2 하루만 연차를 쓰면 6일이 나온다. 너무 짧아 유럽은 힘들 것 같고.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구경은 한 4일 정도 보면 된다던데 부에노스 아이레스만 짧게 갔다 와볼까? 스카이스캐너를 돌린다. 1번 환승하고 30시간 비행에 260만 원이다. 그래도 환승시간이 3-4시간 정도로 나쁘지 않아 보였다. 뭐가 나쁘지 않아 보인다는 건지? 이미 내 마음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확정. 바로 숙소 위치도 검색해 보고 동행은 어떻게 구하는지 치안은 어떤지 검색하다 보니 이미 '남미사랑' 카페 회원이 되어 있었다. 이 실행력 어쩔. 이러나저러나 가장 걱정되는 것은 남미에 '혼자' 가야 된다는 것.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가장 유명한 한인민박이 하나 있는데, 그곳을 가면 동행 구하기도 쉽고 저녁파티도 같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근데 문제는 숙소의 위치.
내가 여행할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은 숙소의 위치다. 치안 이슈도 있지만 뚜벅이 혹은 메트로를 이용하려면 숙소가 시내 부근의 안전한 곳에 있어야 된다. 근데 어느 나라든 한인민박의 숙소 위치는 중심가가 아니다. 숙소 위치의 리스크와 동행을 구할 수 있는 장점을 맞교환하는 것이다. 아니면 중심가 호스텔에 묵으며 외국인 친구를 사귀어볼까 싶기도 했다. 근데 오사카에서 혼여하며 8인실 호스텔에도 묵어보고, 하와이에서 룸셰어도 해봤지만 외국인 친구 사귀어서 동행하기 쉽지 않다. 언어보다 그들도 낯을 가린다는 것. 또 호스텔이라고 다 혼여객 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친구들끼리 와서 호스텔에 묵는 경우도 많고. 나의 지난 여행 경험들을 떠올려보니 동행 구하기가 더 쉽지 않아 보였다. 그냥 속 편히 한인민박에서 지낼까. 아니 근데 보다 보니 돌아올 때 이틀이 걸리는 이 지구 반바퀴 여행이 6일로 되는 게 맞나? 이왕 가려면 5/7-5/10까지 3일은 더 붙여서 최소 열흘은 확보해야 될 것 같았다. 이미 유럽/미국/동남아/호주 등 여행을 많이 다녀 본 나에게 이제는 남미가 아니면 너무 시시할 것 같았다. 근데 또 혼자 가자니 동행에서 혹시 내 미래 남편을 찾지는 않을까. 아니면 흑형들한테 여권, 지갑 다 털리고 여행 온 걸 후회하지는 않을까.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결정을 못 내려 남미사랑 카페만 정주행 하고 비행기 티켓은 못 끊고 있던 찰나.
Bryan에게 연락이 왔다. I got an update from my manager. 혹시 몰라 그에게 여행제안을 했고, 그는 휴가신청은 해두었지만 담당 매니저가 수락을 해줄지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아마 안 되겠지 하며 혹시 같이 갈 친구들은 없는지 오래된 카톡목록을 뒤졌다. 전 직장 동료, 전 직장 후배, 내가 연락할 수 있는 모든 미혼 여자 친구들에게 연락을 돌렸지만 결과는 Fail. 그러던 찰나에 온 Bryan의 연락은 너무 반가웠다. 바로 다음날 같이 비행기를 결제했고, 둘 다 애틀란타 경유 비행기라 애틀란타에서는 같은 비행기를 타고 갈 수 있었다. 오예. 그리고 바로 일정을 짰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와인과 소고기가 싸고, 탱고가 유명하다길래 그냥 맨날 소고기 먹고 탱고나 배워오려 했는데 웬걸. 아르헨티나에 대해 공부하면 할수록 가야 될 곳이 너무 많았다. 세계 3대 폭포인 이과수 폭포. 빙하투어. 파타고니아 브랜드 로고의 배경인 피츠로이. 회사 사무실에서 챗지피티와 논의하며 여행일정을 짜는데 너무 팍팍했다. 열흘 안에 3번의 도시 이동이라니. 매일 회사-집만 반복해도 다크서클이 내려오는 저질체력인데 30시간 여행 후 3번의 도시 이동까지 가능할까?
아니. 가능해야 된다.
왜냐면 느낌적인 느낌상 다시는 남미에 갈 일이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 여행에 남미를 결정한 이유도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더 멀리 떠나야 된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5월에 휴가 갈거라 했더니, 나의 친한 차장님 아저씨도 같은 조언을 내게 해주었다. "야, 젊을 때 먼 데로 가라. 나이 들면 몸도 힘들고 애 낳으면 가까운 휴양지 밖에 못 간다." 그래서 대답했다. "네, 그래서 진짜 멀리 갈려고요!" 재작년 호주/미 서부, 작년 하와이 여행에서 모두 최소 하루는 아프고 체력이 달려 끙끙거렸기에 남미는 상상도 안되긴 했다. 또 가서 체력이 달려 탱고쇼에 클럽은 무슨 몸져 누우면 어떡하지. 근데 내가 지금 이런 생각으로 남미여행을 포기한다면. 도대체 지금 보다 더 늙어선 어딜 갈 수 있겠는가. 남미사랑 후기 보니까 부모님 모시고 여행 간다는 분들도 많더구먼. 걱정은 접어두고 일단 가는 걸로. 챗 지피티와의 몇 차례 의논 결과 나의 일정이 짜졌고, 도시이동 간 비행기 시간과 버스시간, 그리고 투어 예약 사이트들을 알아보았다. 나는 게으른 편이지만, 그래서 한번 맘먹었을 때 끝까지 한방에 싹 다 해야 된다. 왜냐면 흐름 끊기면 더 귀찮다. 그렇게 맘먹고 2-3일 내 일정 다 짜고 숙소, 버스, 비행기, 투어까지 예약 완료 했다. 하는 김에 유명한 탱고쇼도 미리 예약할까 했는데 현지에서 예약하면 더 싸다니 패스.
이렇게 간다. 갑자기.
생각에도 없던 남미를. 이래서 주위 사람이 중요한가 보다. 친한 직장동료 오빠의 남미사랑 여파가 이렇게 크다니. 아니면 내 귀가 너무 얇은 건가 싶기도. 이러나저러나 나름 프로 여행러에게 새로운 자극은 남미에 있으리라 생각하며. 죽기야 하겠어라는 마음으로 한 번 가보겠다. 한 달 정도 남았고, 새 직장에서 휴가는 자가결재 시스템이라 내가 올리면 부서장에게 알림만 간다. 그러니 부서장은 이미 나의 휴가계획을 알고 있을 거고 문제는 전무님. 오자마자 무슨 아르헨티나?? 하며 백퍼 놀라실 것 같다. 그리고 내 자리가 전무님 방 바로 앞자리라 오래 비우면 티가 많이 난다. 이런 몹쓸. 그래서 솔직하게 휴가 간다고 하지 않고, 어버이날을 맞아 부모님 뵈러 고향에 좀 오래 있다 오려한다 라는 시나리오를 미리 짜두었다. 기회는 두 번. 다음 주에 있을 부서 회식과 그다음 주에 있는 전무님의 생신. 나는 전무님의 생신 때 보고 드리기로 했다. 귀여운 케이크, 손편지와 함께 구두 보고. 전무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다음 주부터 제가 휴가라 부재 예정입니다. 멘트까지 완벽. 후우 그래 내가 휴가 간다는데 알바노고. 이제 옷가지랑 핸드폰 스트랩, 아 맞다 그리고 ESTA 비자까지 잘 준비해 보자 빠샷!
* 미국 경유 시 최종 도착지가 아니어도 비자발급을 해야 된다. 참고하시길.